제2장 흙바람 8회

  • 입력 2014.03.02 19:31
  • 수정 2014.03.13 20:1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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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좀체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개 한 마리를 다 먹고 할아버지가 용한 의원들을 불러들였지만 때로 피를 토하기도 했다. 폐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억울한 감옥살이로 병을 얻었다고 했지만 의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병일 거라고 했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지면서 논밭이 하나 둘 팔려나갔다.

이듬해 전쟁이 터졌을 때 아버지는 이미 거동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선택은 전쟁이 일어난 것을 학교에서 알았다. 선생님은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군이 이기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무도 전쟁이 무언지 몰랐다. 해방 전에 일본 교장이 늘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했지만 아주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어른들도 전쟁이 무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젯밤에 그 쿵쿵거리는 소리가 뭔 소리였댜?”

“글씨, 누구는 하늘에서 은하수가 터지는 소리라고도 허고, 누구넌 대포소리라고도 허는데, 낸들 아나. 하여간 생전 첨 들어본 소리여. 똑 저긔 곱돌광산서 남포 떠트리는 소리 같더만.”

어른들은 모여서 수군거리며 불안해했다. 그런데 갑자기 지서장이 한밤중에 우리 집에 와서 삼촌을 찾았다. 그 무렵 삼촌은 보도연맹이라는 단체에 들어 있었다. 해방 후에 친구였던 소사 이씨는 남로당이 되었다고 했다. 삼촌은 그를 조금 따라다니긴 했어도 할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로 다시 예전의 말없고 일만 하는 삼촌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도 삼촌은 보도연맹이 만들어질 때 강제로 거기에 가입해야 했다. 지난날의 죄를 씻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편히 살려면 그래야 한다며 도장을 받아간 사람이 다름 아닌 지서장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항렬이 같은 일가붙이였다.



“자네, 내 말을 잘 들어야 하네. 오늘 밤으로 쌀 두 말만 지고 산으로 들어가게. 토굴을 파던, 바위 밑에 숨던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고 한 달만 있다가 나와. 안 그러면 큰 일이 벌어질 테니까, 자네하고 보도연맹에 든 우리 일가 사람들은 꼭 내 말대로 해야 혀.”

지서장은 잔뜩 겁을 먹은 얼굴이었다.

“뭔 소리래요? 무슨 죄를 지었다고 도망을 가라는 거유?”

삼촌도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일부터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어. 그런데 이게 심상치가 않어. 전쟁이 났다는 소문은 들었지?”

“듣긴 들었는데, 우리가 승승장구하고 있다구 허더만요.”

“그게 아니여. 지금 인민군덜이 개미떼같이 내려온디야. 글고 원주 쪽에서 보도연맹원덜을 몰아다가 죄 처형을 했다는 말이 있어. 그러니께 당장 도망을 가야 혀.”

“보도연맹은 이승만 대통령이 맨든 거잖유? 대한민국에 충성을 허겠다구 맹세꺼지 한 사람덜인데 그게 무슨 말씀이셔유?”

옆에서 듣고 있던 할아버지도 놀라서 수염이 바들바들 떨었다.

“동생, 아니 지서장, 자네가 우리 애럴 가입시킬 때넌 비료두 준다, 고무신두 준다 허더니 이제 와서 도망을 가라니, 글고 처형이라믄, 죽였다는 말이여?”

“형님, 그게요. 전쟁이 터지고 나니께 전에 좌익을 했던 사람들이 다시 맴이 변해서 인민군 편에 설 지 모른다고 해서 그러는 거유. 원주 보도연맹원들이 한 구뎅이에서 죄다 몰살을 했다구 그러네유. 지금 이거저거 따질 틈이 없어유. 후퇴하는 군인들이 여기까지 오믄 나두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오밤중에 달려온 거예요.”

몰살을 시켰다는 말에 삼촌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흐린 호롱불 아래서도 잔뜩 겁을 먹은 삼촌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래. 아재 말씀이 맞다. 우선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급한 불만 피하믄 살 길이 있을 거다. 어서 짐을 싸거라.”

이불 둥치를 껴안듯이 안고 벽에 기대있던 아버지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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