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

  • 입력 2014.03.23 20:28
  • 기자명 한도숙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무가 너무 좋은데 값이 형편없다고 아내가 걱정이다. 크고 잘생긴 무를 깍둑 썰어 깍두기를 만든다. 깍두기 국물에 밥 한 그릇 뚝딱하고 나면 춘곤증에 그만 나른해진다. 겨울을 나면서 쉬어 터진 김장김치에 물린 입맛을 사로잡는데 그만이다. 깍두기는 그렇게 우리 김치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또 다른 깍두기가 있다. 물론 조직폭력배들을 깍두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모가 그렇게 연상되어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깍두기 보다 우리에게 친근한 깍두기는 따로 있다. 어린 날 놀이를 할 때 편을 가르는데 짝이 맞질 않으면 그중 나이어린 아이는 그냥 깍두기라고 한다. 그때 깍두기는 이편도 저편도 아니다. 게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쪽도 거들고 저쪽도 거든다. 게임의 목적이 함께 하기 위한 것이기에 어느 편을 들어도 상관이 없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깍두기는 그들 사이에서 약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놀이문화에 남아있던 깍두기가 이젠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깍두기의 원형은 우리농촌사회의 안전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대지주 중심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우리나라는 소농 중심의 사회였다. 소농들은 마을 단위로 자치를 이루고 살았다. 지금은 농기계로 인해 들판에 농민들을 구경하기가 힘들지만 전통적 농사일은 여럿이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두레였다.

두레는 마을의 자치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고리로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그 규율은 엄격 했다. 조리를 돌린다거나 멍석말이를 하는 것은 규율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처벌을 넘어 자치조직에서 배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줌싸개들에게 키를 씌워 소금 얻으러 보내거나 개구멍받이 아이를 복둥이라 하여 내치지 않고 양육하는 형태들은 공동 교육의 장이며 촘촘한 사회 안전망이었다. 바로 깍두기처럼 사회적 약자들을 언제나 보호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들밥을 넉넉히 챙겨 나와 뛰노는 아이들은 물론 지나는 길손에게도 한 술 먹게 하는 것이 마음 씀씀이 이전에 구조에 있었던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의 군사조직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소농집단의 마을자치가 농민군 편제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실제로 한마을의 어른이 중론을 모아 결정하면 일은 일사천리로 이뤄진다. 이는 홀앗이로는 하기 어려운 농사일에서 만들어진 전통일 것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하고 행정구역을 개편(1914년)한 것은 이런 자치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도 끝내 경제적 자치와 문화적 자치를 버리지 않고 지켜내었던 저력을 우리 윗대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자치라는 걸 모르고 산다. 자본주의 상품과 서비스로 자치는 대체 되었다. 돈이 규율이고 법이고 휴머니즘이다. 거기에 깍두기는 설자리가 없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정의다. 세상의 농민들이 깍두기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두레의 비단깃발이 이젠 박물관에 박제된 시대이지만, 우리에게 깍두기의 설 자리를 마련 할 여유는 진정 없는 것인가.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