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도 백성들에게 물었다

  • 입력 2014.04.06 21:01
  • 기자명 한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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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양인이 부담하는 軍役(군역)을 布(포)로 대신해 국가재정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양인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幼學(유학) 신분으로 위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로써 남은 양인의 부담이 무거워졌고 이는 중요한 민생과제로 떠올랐다.

영조대왕은 均役(균역)을 실시하기 위한 방편을 고민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에게 군역이 부과되는 것을 반대했다. 세금을 물리는 논밭(田結)에 군역을 물리는 結布(결포)제와 사람에게 물리는 포 대신에 가호단위로 포를 물리자는 戶布(호포)제가 있는데 이는 양자 모두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물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민이 길어지면서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다가 대왕 26년에 충청감사 홍계희가 결포를 상소하고 호조판서 박문수가 포 보다는 錢(전)으로 거두어들이자는 의견을 냄으로써 다시 촉발 되었다.

영조는 정책을 결정하기보다 먼저 백성의 의견을 듣고자 했다. 대왕26년 5월 19일 임금은 창경궁 홍화문으로 나가 50여인의 士庶人(사서인)들을 만났다. 사서인들은 호포를 좋아했고 결포를 주장한 사람은 10여인에 불과했다. 이것에 부족했는지 다시 7월 3일 성균관 유생80여명과 한성5부 坊民(방민)들을 만나 호포제의 찬반만을 물었다. 그러자 유생들은 호포(전)제를 반대했고 방민들은 호포(전)제가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호전이든 결포든 반대하기에 이른다. 양반들의 제 잇속 지키기에 백성들만 결단이 나는 것을 안 영조대왕은 기존 군포의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여준다. 대신 나라재정을 해결할 방편을 마련하라고 신하들을 다그친다.

쌀수입 유예 20년이 끝나가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2015년이면 자동으로 관세화 수입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쌀개방협정 어디에도 자동관세화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모든 것은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다. 의무면제(waiver)나 현상유지(stand still)등이 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농민들에게 알려졌다. 정부는 이런 식으로 협상 전에 우리 입장을 알려 협상력 자체를 버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3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정부의 입장은 정리된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이미 정해진 결론으로 몰아갈 민간 공론화작업이 진행됐거나 진행중에 있다. 국민들의 반발이나 농민들의 반대에는 귀를 막고 친정부인사와 단체들을 동원한 토론회, 포럼, 지역설명회들로 모양만 갖추고 가겠다는 것이다.

농식품부가 벌이고 있는 쌀관세화 토론회도 마찬가지다. 이미 정부입장을 정리한 상태에서 마지못해 반대 입장을 들어보겠다는 것은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봉건 조선의 영조대왕이 백성의 의견을 물은 것처럼 진정성을 갖고 농민들을 대해야 한다. 쌀농사를 지키겠다던 20년 전의 정치인들은 지금도 쌀을 지키겠노라 장담하고 있다. 높은 관세율은 의무수입물량보다 효과적이라 주장한다. 관세는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지게 돼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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