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11월 초는 전국적으로 한창 밀을 파종하거나 지역에 따라 이미 파종이 끝났어야 하는 때다. 하지만 올해 밀 생산단지들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일부 지역의 경우 파종은커녕 농가에 종자 공급도 끝내지 못한 상태다. 대표적 월동작물인 밀은 하계작물(벼·콩 등)을 수확한 뒤 파종하는데 이들 수확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거나 잦은 강우로 땅이 젖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파종 적기인데 기계가 들어가서 작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종자는 60% 정도 공급했지만 아직 한 필지도 파종하지 못했고, 정확한 파종 일정도 아직 예측할 수 없다.” 지난 12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구례밀영농조합법인 사무실에서 만난 최용범 구례밀영농조합법인 본부장이 말했다.
지난 9월 폭우에 이어 10월까지 비가 잦은 날씨가 계속돼 땅이 마를 새가 없었다. 경남 합천의 사정도 비슷하다. 지난 7일 김석호 합천우리밀영농조합법인 상임이사에 따르면, 파종 시기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종자 공급은 약 33% 정도에 그쳤다. 김 상임이사는 “이런 경우는 올해가 처음이다. 늦게 심어도 밀이 자라긴 하지만, 그만큼 파종량을 늘리거나 복토를 많이 해야 한다”라며 “농가에는 11월 말까지는 심어도 된다고 알리고 있으나 정확하게 예측하긴 어렵다. 지난봄에도 비가 많이 와서 결실이 제대로 안 돼 수확량이 뚝 떨어졌었다. 1200톤을 계획했는데, 630톤밖에 수매하지 못해 농가 손실이 매우 컸다. 파종까지 이런 상황이 되니 이중고”라고 전했다.
김제·논산·상주·장흥은 주말(11월 9·10일)을 거치면서 일부 농가들이 파종을 조금씩시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콩 수확이 끝나지 않아(김제·논산·상주) 본격적으로 밀 파종을 시작하기엔 어려움이 있고, 토질 종류와 건조 상태가 달라 파종이 미뤄지는 실정으로 파악된다. 기상 상황에 대한 우려가 남았지만, 한동안 비 소식이 없다면 파종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윤종섭 논산상월밀생산단지 회장은 “물 빠짐이 좋은 데는 파종하고 있지만 현재 10%에 그친다. 예년 같으면 콩 수확을 벌써 끝내고 밀 파종도 절반은 했을 텐데 올해는 아직도 콩잎이 떨어지지 않고 잡풀까지 퍼렇게 살아 있어 수확 작업(콤바인 가동 불가)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콩이 심긴 논의 경우 물이 흥건한 곳이 있을 정도로 마르질 못했다”라고 전했다.
콩을 수확해야 밀을 파종할 수 있어 사실상 콩 재배 여건은 밀과도 직결되는 셈이다. 9월까지 이어진 이상 고온 현상과 10월의 잦은 강우는 단지 밀 파종을 늦춘 것뿐 아니라 콩의 생장과 낙엽기(잎이 떨어져야 수확 가능)에도 영향을 끼쳤다.
빠르면 10월 말부터 파종이 시작되는 상주 역시 예년이라면 파종이 끝났어야 하지만 지난 11일 기준, 전혀 파종하지 못하고 종자 공급도 막 시작된 상황이다. 상주 지역은 대부분 밀을 밭에 파종하는데 땅은 어느 정도 마른 상태이지만 콩 수확이 늦어지면서 파종까지 지체되고 있다.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야 콩 수확에도 속도가 나는데, 비가 잦았던 데다 날이 포근하고 안개가 자주 끼어서 콩 수확 작업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게 현장의 전언이다. 아울러 파종이 늦춰지는 동안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 파종된 밀이 제대로 활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겨울을 나게 돼 수확량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정근 나누리영농조합법인(경북 상주) 이사는 “11월 중순까지만 파종하면 평년 수확량 정도는 무난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라며 “물론 이번 겨울에 큰 변수가 없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관건은 월동”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상황은 유례없던 지난 9·10월 기후 때문이다. 추석 직후인 9월 20~21일엔 전국 곳곳에 폭우가 덮쳤다. 하루 강수량 300mm, 1시간 최다 강수량이 100mm를 훌쩍 넘는 지역이 속출했고, 9월 한 달간 전국의 평균 강수량은 평년(155.1mm)보다 약 1.6배 많은 241mm를 기록했다.
이뿐 아니다. 1973년 이래 9월 전국 폭염일수는 6일로 역대 1위(평년 0.2일)를 기록했고, 전국 7개 지점에서는 처음으로 9월 폭염이 발생했다. 역대급 기록 경신은 10월에도 이어졌다. 강수량은 평년보다 83.1% 많은 수준(115.8mm)이었지만, 문제는 강수일수다. 평년(5.9일)보다 5.1일 많은 11일로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직불금 증액, 배수시설 및 기계·장비 지원 등 시급
안 그래도 열악한 국산 밀 생산 기반은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의 파고가 이어질수록 더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크다. 이에 현장에서는 단지 올해 밀 파종이 지체되는 상황만이 문제가 아니라 밀 생산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모든 지역에서 예외 없이 나온 요구는 밀 전략작물직불금(직불금) 증액이다. 현재 밀은 1ha(약 3000평)당 단작하면 50만원, 논콩·가루쌀과 이모작하면 350만원의 직불금을 받을 수 있다. 단작과 이모작의 직불금액 차이가 큰 건 논콩·가루쌀은 단작 직불금이 1ha당 200만원이라서다. 여기에 밀과 이모작하면 100만원의 인센티브가 지급된다(총 350만원). 이 때문에 현장에선 밀이 제2의 국민 주식임에도 ‘사료(조사료(풀사료)의 경우 430만원)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토로와 함께 최소 200만~300만원 정도는 돼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는 실정이다.
안선권 햇살농축산영농조합법인 대표(전남 장흥)는 “2020년 밀산업육성법이 시행됐는데, 소 사료(조사료)만도 못한 직불금이라야 되겠나. 법 제정 취지에 맞지 않을뿐더러 법이 있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라며 “국산밀 자급률 제고를 떠나 먼저 농민들이 믿고 밀을 심을 수 있도록 가격부터 안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석호 합천우리밀영농조합법인 상임이사도 밀 직불금이 1ha당 최소 250만원은 돼야 한다고 본다. 정부가 밀 직불금을 2025년 100만원으로 올릴 것을 검토 중이지만, 밀 농사를 유지하긴엔 턱없이 모자라다는 인식이 현장에 팽배하다.
정부의 직불금 사업의 목적은 ‘식량자급률 증진, 쌀 수급안정 및 논 이용률 제고’다. 쌀 생산량을 조절하기 위해 논에 밥쌀 이외 작물을 재배해 밥쌀 외 곡물이나 사료 등의 자급률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정책적 목표는 이렇지만 실질적으로는 농가들에게 농업소득과 농업의 지속성을 일정 정도 보장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농민들이 밀 농사를 계속할 수 있으려면 직불금부터 대폭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이유다.
“솔직히 밀 농사에서 소득은 포기한 상태다. 매년 70~80톤을 생산하는데 수입은 7000만~8000만원에 그친다(1kg당 1000원꼴). 물론 다른 작물보다 생산비가 많이 들진 않아 비용을 투여한 만큼의 소득이긴 하지만 전업이라면 전혀 소득이 안 된다. 농가들 사이에선 대량으로 밀을 짓느니 차라리 양파 등 노지 작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일반 농가들이 밀 농사를 지으려면 대량 농지, 건조시설, 각종 기계장비 등을 갖춰야 하는데, 소득이 많이 따라준다면 투자라도 해보겠으나, 워낙 소득 면에서 하위권 작물이다 보니 누구라도 섣불리 투자하긴 어렵다.” 김정근 나누리영농조합법인 이사의 말이다.
배수시설 개선을 위한 지원도 시급하다. 전략 작물은 논 이용 효율을 높이기 위해 논을 재배지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논의 배수 기반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배 확대 위주 정책이 추진되고 있고 그나마 개발·보급되고 있는 배수 기술도 한정적인 시범사업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취재에서 살펴본 지역 가운데 상주를 제외하곤 구례·논산·합천·장흥에서 배수시설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특히 올해 계절을 가리지 않고 폭우와 잦은 강우가 이어진 상황이라 관련 요구에 대한 목소리는 더욱 컸다.
최용범 구례밀영농조합법인 본부장은 “무굴착 배수기술(박스 기사 참조)은 비가 많이 오면 물을 빼내고 가뭄 땐 물을 가두니 작물이 잘 될 수밖에 없다”라며 “식량이 안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업을 늘려야 한다. 예산이 매우 많이 들지도 않는다. 탄소배출을 줄이고 흙을 살린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투자가 야박하다는 건 농업을 천대하는 인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전국에 시범사업 지역이 몇 곳 안 된다. 밀 같은 식량작물보단 주로 논콩 작목반 쪽에 배정되는 것 같다. 쌀 수급조절 목적이란 걸 이해하지만 밀 재배지에도 하루빨리 배수시설이 지원돼야 한다. 그래야 농가들이 안심하고 밀 농사를 지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관련 시설 및 장비 지원이 밀 농업의 현장과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국산밀 생산단지 시설·장비 지원 사업에 선정된 경영체에는 5억원 이내(차등 지원)에서 밀 생산·수확·방제 등에 필요한 콤바인(범용, 확산기·제초기 부착형 포함), (세조파)파종기, 건조기 및 방제 관련 장비를 지원하는데, 정작 필요한 지원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단 1톤 단위 톤백을 들어 올릴 때 꼭 필요한 지게차가 농기계가 아니란 이유로 빠졌다. 반면 건조 과정에서 90% 이상 정선되므로 굳이 필요하지 않은 정선기, 밀은 재배 과정에서 한두 번만 방제하면 되므로 크게 필요하지 않은 방제기는 포함돼 있다. 현장이 정말 필요로 하는 장비가 지원돼야 하는데 탁상행정인 셈이다.” 안선권 햇살농축산영농조합법인 대표가 지적했다.
안 대표는 재배 뒤 부산물인 밀짚의 처리도 문제로 꼽았다. 밀짚은 곤포 사일리지(짚을 두루마리 휴지 모양으로 압축 포장해 사료 등으로 씀. 속칭 공룡알·마시멜로)로 처리해 활용할 수 있는데도 여전히 많은 농가가 비용 때문에 논에서 태워버려서다. 안 대표는 “장흥에는 한우·염소 등 동물이 인구의 2배나 많다. 태워버리면 이들에게 먹이지도 못하고, 탄소 배출량도 엄청나다. 이에 곤포 사일리지 비용을 지원사업에 포함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결국 최종 지원에선 빠졌다”라며 “밀 농사는 쟁기질부터 수확 잔여물 처리까지 모두 포함되는 과정인데 밀 농업과 관련 없다는 거다”라고 꼬집었다.
이 같은 생산 기반 강화와 동시에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품종 개발·보급도 시급한 과제다. 국산밀 육성과 관련해선 지금까지 다수확·빠른 숙기·단백질 함량 제고 등 품질 개선과 생산량 증대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기후위기와 지역적 특성에 잘 적응하는 품종 육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재해가 이미 매년 반복되고 있어 더욱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
최용범 구례밀영농조합법인 본부장은 거듭 강조했다. “황금알(품종)이 다들 빵이 엄청 잘 된다고 하는 품종인데, 잦은 비엔 매우 취약하다. 즉 품종에 대한 품질개량은 잘 되고 있는데, 기후위기 대응에는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다. 농촌진흥청에서 나름 고민하겠지만, 관련해서 우리 피부에는 와 닿는 게 전혀 없고 현장 보급 품종도 없다. 품종 개발부터 현장 보급, 지역적응성 검증까지 되려면 매우 오래 걸리므로 서둘러야 한다. 기후변화 대응은 사실 지금까지 우리도 크게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제2차 밀 산업 육성 기본계획(제1차는 2021~2025년)에도 적극 반영돼야 한다.”
무굴착 땅속 배수 기술
무굴착이란 말 그대로 땅을 파내지 않고도 배수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기술이다. 트랙터에 작업기를 달아 주행시키면서 60cm 깊이로 배수관을 깔고, 그 위에 왕겨·모래·자갈(소수재. 물이 잘 빠지게 하고, 관에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함) 등을 묻어주는 방식이다. 밭작물의 침수는 물론 과습 피해도 막아줘 기후변화 대응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땅을 파고 관을 묻는 굴착식 방식에 견줘 시공비가 3분의 1 수준(ha당 약 1232만원. 굴착식은 3720만원)이다. 아울러 한번 설치하면 10년 이상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고 땅을 파거나 뒤집지 않아 토양 교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농촌진흥청이 2018년부터 신기술 시범사업으로 보급하고 있다. 사업비로는 국비·지방비가 50%씩 지원되며 각 시군농업기술센터가 농진청 시군사업 가운데 하나로 신청하는 방식이다. 현재까지는 1년에 4~5개 지역, 시군당 4~5ha(평지의 경우 7~10ha)에서 사업비 1억원 규모로 시행되고 있다. 시공은 기술이전 업체가 진행한다. 무굴착 땅속배수 효과 및 경제성에 대한 농가 현장 실증실험 결과, 2023년·2024년 김제 죽산면에서 현장 실증실험(무굴착 땅속배수 효과 및 경제성)을 진행한 결과 토양수분은 각각 18%, 33% 감소했고, 밀 수량은 35%, 50%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왕겨 충전형 저비용 무굴착 땅속 배수
무굴착보다 농가 부담을 더욱 줄이는 대안으로 개발된 기술이다. 관을 매설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뚫어 압축된 왕겨를 집어넣는 방식이다. 왕겨 층 사이로 빗물이 흘러 들어가 물이 빠지는데 배수 효과가 탁월할 뿐 아니라 비용도 무굴착보다 저렴한 ha당 700만~800만원 정도(약 33% 절감)다. 아울러 왕겨는 탄소 비율이 높아(45%) 혐기인 땅속에서 잘 부식되지 않아 한 번 시공하면 약 13년 반 정도 사용할 수 있다. 농가의 자가 시공도 가능하지만, 현재 타공기가 보급되지 않은 상태라 시공은 업체가 하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전국 5곳(순창·예산·철원·포항·함평)에서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