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기후위기로 인한 밀 생산량 감소와 품질 저하, 폭등하는 생산비, 그럼에도 근본적 생산환경 개선방안엔 무신경한 채 말로만 ‘2025년 밀 자급률 5%, 2030년 10%’를 공언해 온 정부…. 현장 밀 재배 농민들은 이상과 같은 악재를 겪으며 점차 밀 생산 의지를 잃어가고 있다. 밀 자급률 향상에 모든 것을 걸어온 농민들을 위한, 정부의 근본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갈수록 악화되는 생산환경…최대 고민거리는 ‘농가 사기 저하’
전북 부안군 하서면 소재 부안우리밀영농조합법인은 밀 자급률 향상을 위해 앞장서 온 영농조합 중 한 곳이다. 2011년 설립된 부안우리밀영농조합은 ‘우리밀 살리기 운동’ 차원에서 지역 농가 조직화를 통한 국산밀 생산 및 품질 관리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국산 밀 소비 촉진을 위해 부안 관내 제빵소, 중국집 및 로컬푸드 매장 등 소비처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파고는 밀 농가들에도 들이닥쳤다. 올해 밀 재배 농민들은 향후 농사 여부를 판가름할 수준의 악재를 이중, 삼중으로 겪고 있다.
첫째, 흉작으로 밀 생산량이 감소했다. 2022년 2604톤, 지난해 3164톤을 기록했던 부안우리밀영농조합의 밀 생산량은 약 1946톤으로 크게 줄었다. 전년 대비 생산량이 약 40% 감소한 셈이다. 재배 품종 중 제빵용으로 많이 쓰이는 금강밀의 생산량은 2022년 830톤, 지난해 1923톤에서 올해 603톤, 즉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이는 부안만의 상황이 아니다. 유재흠 부안우리밀영농조합 경영이사는 “전남의 경우 전년 대비 생산량이 50%, 즉 반타작을 기록했으며 전북 또한 30%의 생산량이 줄었다”며 “2020년 이후 가장 심각한 흉작”이라고 설명했다.
둘째, 그나마 수확한 밀의 전반적인 품질도 악화했다. 올해 초 나타난 이상 고온과 과도한 습도는 등숙(밀알이 여무는 것)을 방해해 밀알이 작아지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밀의 품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인 단백질의 형성 과정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부안우리밀영농조합에서 생산한 금강밀의 경우, 2022년엔 830톤 물량 중 밀 품질 등급제 기준 1등급이 648톤, 2등급이 182톤이었으며 지난해엔 1923톤 물량 중 1등급이 1620톤, 2등급이 303톤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생산량 자체도 603톤으로 감소했지만 그중 1등급 밀은 없고, 2등급 116톤과 3등급 481톤, 그리고 몇 년간 나타나지 않았던 등외 등급 물량 약 6톤이 발생했다. 올해 수확한 밀의 평균적인 단백질 함량은 지난해 대비 약 5% 감소했다는 게 유재흠 이사의 설명이다.
수확량 감소와 품질 저하는 자연스레 소득 감소로 이어졌다. 2022년 443만9667원이었던 1ha당 평균 조수익은 지난해 431만9333원에서 올해 300만6000원으로 격감했다. 이런 와중에 셋째, 생산비는 생산비대로 증가했다.
유 이사는 “4~5년 사이 기름값이 계속 오르면서 전반적인 생산비가 다 올랐다. 밀 생산 과정에서 파종 등 농기계 작업이 필연적으로 동반될 때가 있다 보니 임대작업을 신청하려 해도 (농기계 사용 과정에서의 비용 증가에 따른 기계 보유자의 우려 때문에) 요즘은 누가 임대작업을 해주지도 않는다”며 “콤바인 작업비 등 수확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4~5년 전엔 1ha당 20만~25만원이었는데 지금은 35만원으로 올랐다”고 밝혔다.
유 이사가 올해 부안우리밀영농조합의 1ha당 밀 생산비를 산출해 본 결과(생산량 4톤 기준), 1ha당 생산비는 최소 609만4000원에서 최대 789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술한 대로 1ha당 평균 조수익은 300만원대로 하락한 상황에서, 그 2배에 달하는 생산비가 들어간 셈이다.
이상과 같은 악재 속에서 밀 재배 농민들의 전반적인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어떤 면에선 가장 큰 고민거리다. 유 이사는 “최근 1차로 내년 (파종) 물량 신청을 받았는데, 예년 대비 절반의 농민만 신청했다. 그동안은 (밀산업 육성 기본계획 추진을 통해 만들) ‘좋은 날’에 대한 기대심리가 밀 농사를 자극했고 농가들이 기대감과 자부심을 갖게 했으나, 올해는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농민들도 그 자부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라고 진단하며 “악화된 생산 여건 속에서 사기가 저하된 농민들을 향해 정부가 명확한 정책적 신호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기후위기 대응 고품질 밀 생산을 위한 정부 차원의 관리 △악화되는 농가 생산환경에 대한 정부의 구체적 진단 △현행 ‘쌀 생산량 감축’ 목적과 연계된 수준의 전략작물직불제를 넘어 ‘밀 농가를 위한 직불제’ 편성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산밀 위한 자리 10% 비워놔야”
충남 아산시 음봉면 소재 아산제터먹이 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 장명진, 아산제터먹이)의 생산자 조합원들은 앉은키밀(옛 앉은뱅이밀) 등 각종 토종작물을 재배하며 토종작물 가공 활성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토종밀 생산자들에게도 난관이었다. 올해 봄 아산엔 예년보다 비가 많이 왔고, 온도도 예년보다 일찍 뜨거워졌다. 이상기후는 앉은키밀 수확량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평년엔 40톤 안팎으로 수확했던 앉은키밀의 올해 수확량은 약 20톤이었다.
장명진 아산제터먹이 이사장은 “아산제터먹이에선 콩·밀 2모작 체계를 운영해 왔는데, 기후위기로 인해 콩 수확 시기도 늦어지다 보니 적정한 밀 파종 시기도 놓치게 됐다. 이로 인해 밀을 더는 재배하지 않고 콩농사만 택하는 농가도 늘었다”며 “그러다 보니 (아산제터먹이의) 앉은키밀 재배 면적도 지난해 약 4만평에서 2만평 가량으로 줄어들었다”고 토로했다.
생산비는 생산비대로 들어간다. 장 이사장은 “(앉은키밀을 생산하는) 1000평 밭에 들어가는 생산비만 해도 종잣값 10만원에 트랙터 사용 과정에서 드는 비용 20만원, 콤바인 임대료 30만원, 건조비 10만원, 비룟값 15만원으로 도합 85만원이 들어간다. 아산제터먹이의 경우 1000평 밭 기준 대략 120만원의 수익을 거두는데 그중 85만원이 생산비로 빠져나가고 35만원이 남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생산환경 악화로 인해 1년간 가공용으로 쓸 원료 자체가 부족해졌다. 아산제터먹이에선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앉은키밀을 국수·밀가루·튀김가루·부침가루 등으로 가공해 아산제터먹이 소비자 조합원 및 아산시 학교급식, 로컬푸드 매장 등 지역 내외의 필요한 소비처에 공급해 왔는데, 전년 대비 반타작인 수확량을 갖고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양만큼 가공식품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나마 앉은키밀을 활용해 농민가공을 실천하는 타공동체들과의 교류 과정에서 부족분을 받거나, 반대로 타 공동체가 부족할 시 아산제터먹이의 잉여 물량을 나눠주는 식으로 ‘상생’하고 있다는 게 장 이사장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아산제터먹이는 현재 예년 대비 약 10톤의 가공용 물량이 부족하다.
장 이사장은 “점차 밀 파종을 기피하는 농민이 늘어나는 추세임에도 정부의 밀 육성정책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그 원인으로 ‘수입밀에 대한 무방비 상태’를 지적했다. 그는 “저가 수입밀에 대한 제재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아무리 육성계획을 세운다 해도 소용없다. 기업마다 쿼터제를 통해 밀 수입 물량을 조절하든, 국산밀 사용량을 늘리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부여하든, 어떻게든 (국산밀을 위한) 최소 10% 자리는 비워놔야 그 자리가 국산밀로 채워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