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행하는 우표 도안에는 대개 그 나라의 국왕, 작고한 정치 지도자, 역사적인 인물, 특산물, 전통문화와 관련된 상징물 등이 소재로 활용돼 왔다. 그렇다면 우표는 어떤 절차를 거쳐서 만들었을까?일제 말인 1943년에 체신공무원으로 임용되어서 40여 년 동안 주로 우표발행 관련 업무를 해왔다는 김동권 씨와 함께 우표발행에 얽힌 이모저모를 알아보기로 한다.“체신부에서는 연초에, 아예 그 해의 우표 발행 계획을 미리 세워서 공표를 하지요. 하지만 그건 ‘보통우표’의 경우이고요, 올해가 광복 몇 주년이니 그 기념으로 우표
우정국 낙성식을 기회로 삼아 거사하였던 갑신정변이 결국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의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버렸다. 더불어서, 그들 개화파가 꿈꾸었던 ‘우편 행정 근대화’ 정책도 물거품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 대장성에 인쇄를 의뢰하여 미리 제작했던 일명 ‘문위우표’(2종)는 그중 극히 일부가 서울-인천 사이를 오간 서신을 통해 20일 가량 통용되다가 그 쓸모를 다했다.그런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갑신정변 파동으로 우편업무 자체가 중단돼버린 상황에서, 애당초 국제우편용으로 제작 주문을 했던 세 종류의 고액권 우표
-야, 너, 우표 수집하는 사람들이 제일 비싸게 쳐주는 우리나라 우표가 뭔 줄 알아?-당연히 알지. 국사시간에 배운 갑신정변 있잖아. 김옥균, 홍영식 이런 사람들이 일으킨.-우표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갑신정변이야?-바보야, 갑신정변을 우정국 개통식인지 낙성식인지 하는 그 파티 장에서 일으켰는데, 그 때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가 등장했던 거야. 그런데, 갑신정변이 실패하는 바람에, 그 우표를 며칠 써먹지 못 하고 끝나버렸거든.-그럼 그 때 발행한 우표 한 장만 가지고 있으면 큰 부자 되겠네?-물론이지.중고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 사이
만일 자녀가 학교에서 이런 숙제를 받아왔다고 치자.-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중반에 서울에 거주하던 사람이, 전라북도의 한 농촌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그 편지가 서울의 우체국을 떠나서 수취인이 살고 있는 그 지방의 우체국에 도달하기까지는 얼마 동안의 시일이 걸렸을 것인지 조사해 오라.자, 우리는 이 아이의 숙제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백과사전을 뒤적거리거나, 혹은 행정안전부나 우정사업본부 관계자에게 문의를 해 봐도 신통한 답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서울 종로에 있는 광화문우체
정부는 가족계획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세 갈래의 특수사업을 추진했다. 병원 가족계획사업, 사업장 가족계획사업, 그리고 예비군 가족계획사업 등이 그것이었다. 가족계획에 적극 협조한 사람들에게는 연말정산 시 세액공제 혜택을 비롯하여, 주공아파트 청약 우선권 등 각종 보상이 주어졌다.물론 정관수술이나 난관수술을 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인센티브라는 그것도 출산율 감소 추세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실시 초기였던 1974년에는 세 자녀를 둔 사람에게까지 혜택이 주어졌으나, 77년도에는 그 대상이 두 자녀 가정으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족계획협회는, 두 자녀 갖기 운동에서 하나만 낳자는 쪽으로 캠페인 구호를 바꾸는데, 대표적인 표어가「둘도 많다」와「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등이었다. 그 무렵에 매우 공격적인 포스터 하나가 등장했다.둥그런 지구에 수많은 사람들이 박쥐 떼처럼 다닥다닥 몸을 포갠 채 아우성치며 매달려 있고, 미처 매달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 내리는 형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그림 옆에다「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폭발」이라는 섬뜩한 구호를 달아놓았다.‘셋만 낳자’에서 ‘둘만
가족계획의 주요 홍보수단인 표어와 포스터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이 운동을 추진하는 쪽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산아제한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조바심을 냈는지 알 수 있다.1963년에 처음으로 전국가족계획대회를 개최했는데 그때 행사장에 내건 표어는「우리 집 행복은 가족계획으로」였다. 다음 해에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가족계획협회가 공개모집을 했다. 5,000여 편의 응모작 중에서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기르자」「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자」라는 표어가 뽑혔다. 매우 점잖고, 다소 밋밋하고, 더불어 좀 진부한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인구가 가장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초반에 걸친 5년여 동안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해방 후, 평균 5년에 한 번씩 전국의 인구를 조사하는 ‘인구센서스’(현재는 ‘인구주택총조사’)가 실시되었는데, 1960년도에 실시한 조사 결과는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1955년에 2,150만 명이었던 남한 인구가 5년 뒤인 1960년에 조사를 해보니 약 2,500만 명으로 증가하여, 광복 직전(1944년)의 전국 인구(2,590만 명) 수준에
1970년대 중반 무렵, 교외의 예비군 훈련장.제대 직후의 예비역들이 모이는 동원 예비군 훈련장과는 달리, 이미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두셋씩 둔 일반 예비군을 교육하기 위한 그 훈련장의 풍경은, 닳아 문드러진 개구리복의 무늬만큼이나 군기가 영 흐리멍덩했다.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고 직장마다 피가 끓어 사기가 드높다는 따위의 예비군가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고는 있었지만, 한창 생계를 위해 뛰어야 하는 그들에게 그 교육인지 훈련인지 하는 따위는, 그야말로 영양가라고는 일점도 없는 시간 죽이기 놀음에 다름 아니었다.“아이고 참, 내가
해방이 되자 해외에 있던 사람들이 속속 서울로 돌아왔다. 북녘에서도 남녘에서도 해방된 수도를 구경하기 위해 너도나도 서울로 몰려들었다. 서울의 인구가 급속하게 팽창하였다.그런 상황에서 전차만으로는 더 이상 서울의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하여, 일제 말기에 운행을 중단했던 버스가 서울 거리에 다시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웠다.1950년대 말 즈음에 이르자 버스를 비롯한 자동차의 대수가 급격히 늘어서, 그 동안 도로의 주인 노릇을 독차지 했던 전차는 그 자리를 자동차에게 내어주고는 얼자의 처지로 밀려났다. 아니, 오히려
해방이 되었다.일제에 의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숨죽여 지내야 했던 전차의 승무원들이, 해방공간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주창하면서 쟁의를 벌이기도 했는데, 요즘의 지하철 노조가 차량 기지창에서 모임을 갖고 파업 등을 결의하는 것처럼, 당시도 마찬가지였다.“그때 전차의 차고(車庫), 즉 기지창은 동대문 시장 앞에 하나 있었고 용산에 또 하나가 있었어요. 그리고 예전 이스턴 호텔. 그 옆에 경성전차주식회사 본사가 있었는데….”서울 토박이 이성선 할아버지의 얘기다. 해방이 되자 는 으로 그 이름표를 바꿔 달았
아침, 중학생 이성선이 서울 방산동의 집을 나선다. 이윽고 을지로4가의 전차 정거장에 이르렀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돈암동의 경동중학이다. 이성선이 서 있는 전차 정거장의 좌우로는 부단히 우마차가 지나다닌다.태평양 전쟁 이전에는 서울 시내에 버스도 다녔으나, 전쟁이 터지자 일제가 기름부족을 이유로 운행을 중단해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화물은 우마차로 운반되었다.그러니까 길 가운데로는 근대 문명의 발명품인 전차가 다니고, 그 양쪽 옆으로는 중세 시대의 교통수단이라 할 우마차가 지나다니는 묘한 부조화…그것이 일제 말 서울시내의 거리 풍
“내가 알기로는 서울에 전차가 도입된 때가 1899년 무렵으로 아는데…그러니까 당시 미국 사람이 조선 황실로부터 영업권을 얻어가지고 종로에서 청량리까지 갔던 것이 시초라던가….”1929년생으로 청계천 일대에서 ‘서울의원’이라는 동네의원을 운영하며 살아온 이성선 원장은, 우리나라에 처음 전차가 도입된 내력을 이렇게 들었노라고 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1898년 2월, 고종의 명을 받은 육군총장 이학균이 콜브란(Corlbran)이라는 미국 사람과 마주 앉았다, 이학균이 먼저 입을 연다.“궁궐 안에 전등이 가설된 이후에,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 첫사랑 떠나간 종점 / 마포는 서글퍼라정두수가 노랫말을 짓고 박춘석이 곡을 만들고 은방울 자매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가요 ‘마포종점’의 제1절 가사가 이렇다. 이 노래의 제2절에는 당인리 발전소도 나오고 여의도 비행장도 나온다. 그래서 ‘마포 종점’은 지금도, 서울에서 살았던 나이 든 축에게는 아련하면서도 ‘서글픈’ 향수를 불러일으킨다.이 노래가 발표됐던
제주의 견습 테우리 소년이 은퇴를 앞둔 베테랑 테우리를 따라 한라산 중턱을 오른다. 소년은 말 테우리 노릇의 ‘오름에서 한라산까지’ 모든 것이 궁금하다.“할아버지가 모는 말이 예순 마리나 된다면서요, 그 말들을 어떻게 다 알아봐요?”“오래 하다보면 말들하고도 얼굴을 익히는 법이야. 정 모르면 엉덩이에 찍힌 내견을 보고 구분하기도 하고,”“점심은 어디서 먹어요?”“다른 테우리들 하고 어느 내창에서 만나자고 미리 약속을 했다가 거기 모여 먹는 거란다.”평소에, 자신이 관리하는 말들이 주로 풀을 뜯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테우리들은 여럿이
“어쩐 일로 내견장에 말을 네 마리나 끌고 나왔어?”“아, 금년에 요놈들 내견 지질 때가 돼서….”“아이고, 자네 어제 읍내 가더니만 대장간에 내견 만들러 갔었구먼.”내견. 말 엉덩이에다 쥔장이 찍는 불도장을 이르는 말인데, 한자말 같지만 그게 아니고 순수한 제주 사투리다.어미 말이 새끼를 낳으면 한 살 때까지는 어디를 가나 자기 새끼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따로 표시를 해두지 않아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그러나 두 살이 넘어서면 어미 품을 떠나 독립을 한다. 그래서 2년차 되는 때에 엉덩이에 표시를 해두어야 한다.그러니까 내견
이른 봄, 한라산 테우리가 말 수십 마리를 이끌고 들로 내려왔다. 오늘 작업을 하기로 약정된 보리밭 어귀에서, 먼저 간 선배 테우리의 영령을 위무하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물경 백여 마리에 이르는 말들을 널찍한 보리밭으로 몰아넣는다. 그렇다면 테우리는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통솔해서 밭 볼리기를 했을까?“테우리는 선도를 사고(서고) 그 주름에 사람들이 몰(말)을 딴 데로 못 가게 에워싸서 테우리 있신(있는) 데로만 몰아주면 테우리가 자동차 운전하듯이 욜로 가고 절로 가고 돌아오고…”송종오 할아버지의 얘기에 따르면, 말들을 밭으로 몰
한라산 중산간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가 망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아서 ‘청년 말’로 키웠다. 하지만 사람도 덩치만 불린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듯, 말도 제 노릇을 하자면 교육이 필요하다.농부가 선머슴 같은 말을 끌고 찾아간 사람은 왕년에 마을 사람들의 말을 위탁받아서 산으로 몰고 다니면서 목동 노릇을 했던 퇴역 말 테우리다.그 베테랑 테우리가 설익은 말을 조련하는 데에 교재로 활용하는 도구는 ‘남테’다.“남테라고, 몰(말) 대신 나무로 만들어서 밭을 볼리는 거야마심. 돈 있는 사람들은 삯 줘서 몰을 빌려다가 밭을 볼리니까 남테가
교래리는 한라산의 산간 마을이라 밭농사의 소출이 시원찮으면 주민들은 끼니걱정을 달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오지마을에서도 비할 바 없이 풍족한 것이 하나는 있었다. 사방에 지천으로 널린 땔감이었다. 사람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수십 리 떨어진 오일장 터로 가져가서 일용할 양식이며 생활용품들을 바꿔 왔다.물론 그 시절엔 육지의 산간마을 사람들도 땔나무를 장에 내다 팔아서 먹을거리며 고무신 따위를 구했으나, 고작 지게 등짐으로 운반을 했기 때문에, 한 짐 지고 가봤자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고 나면 변변하게 구해올 수 있는 물품이 없
옛 주소로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한라산의 북동쪽에 위치한 이 산간마을 일대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어서 일찍부터 가축의 방목지로 이용되어 왔다.이 마을에 있는 대규모 분화구 터인 산굼부리는 신혼여행이나 수학여행 차 제주에 온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필수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아 왔다. 마을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승마장들은 모처럼 말을 타보려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물론 그 말들은 울타리가 둘러쳐진 목장에 갇혀서 사료를 먹으며 사육되고 밤이면 축사로 들어가 잠을 잔다. 그렇다면 오륙십 년 전에, 그 산간마을 사람들은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