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가족계획① 풍경-개발연대의 예비군 훈련장

  • 입력 2019.02.15 14:0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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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0년대 중반 무렵, 교외의 예비군 훈련장.

제대 직후의 예비역들이 모이는 동원 예비군 훈련장과는 달리, 이미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두셋씩 둔 일반 예비군을 교육하기 위한 그 훈련장의 풍경은, 닳아 문드러진 개구리복의 무늬만큼이나 군기가 영 흐리멍덩했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고 직장마다 피가 끓어 사기가 드높다는 따위의 예비군가가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고는 있었지만, 한창 생계를 위해 뛰어야 하는 그들에게 그 교육인지 훈련인지 하는 따위는, 그야말로 영양가라고는 일점도 없는 시간 죽이기 놀음에 다름 아니었다.

“아이고 참, 내가 지금 자리를 비울 처지가 아닌데…. 공사현장에 베니어판 납품하기로 했는데, 직원들이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나는 오늘 우리 아버지 환갑잔치가 있는 날인데도 훈련 받으러 나왔다니까요.”

“나중에 보충훈련 받을 셈 치고 빠지지 그랬어요.”

“어이구, 보충교육은 1.5배 아닙니까. 꾹 참고 사흘 받는 게 낫지, 나중에 나흘 하고도 반나절을 따로 모여서 받으려고 해봐요, 눈 튀어나오지.”

요동벌판의 퇴각하는 수나라 군사들처럼 소총을 아무렇게나 어깨에 걸치고,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가면서 연병장에 모여 있는 예비군들의 얼굴에는 오늘은 또 어떻게 하루를 때우나, 하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그때 확성기가 지지직거리더니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예비군 여러분께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대한가족계획협회에서 여러분의 가족계획을 도와주기 위해 훈련장에 나와 있습니다. 희망하는 예비군들은 좌측으로 열외해 주세요! 그 사람들에게는 오늘 훈련 면제해 주겠습니다.

연병장의 대오 여기저기에서 술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이참에 까짓 거, 묶어버려?”

“형씨는 스코어가 어떻게 되시우?”

“나요? 허허허. 투 스트라이크 원 볼이오.”

“투 스트라이크 원 볼이면 아이고, 준수하네. 나는 쓰리 볼 나씽인데….”

“에이, 그럼 김 형은 스트라이크 하나는 잡아야지.”

“이 다음이 스트라이크라는 보장이 있나. 포볼 나오기 전에 마운드에서 내려가야지.”

“와, 꾸역꾸역 많이들 나가는데…. 그럼 저 사람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훈련 면제해준다잖아. 소총 반납하고 우장춘 박사한테 가는 거야.”

“우 무슨 박사…라고? 그 박사 어느 병원에 있는데?”

“이런 무식한…아, 수박씨 빼러 간다니까.”

이윽고 단산을 하겠다는, 자녀를 그만 낳겠다고 결심을 굳힌 젊은 가장들을 태우고서 ‘가족계획협회’의 글자를 새긴 버스가, 예비군 훈련장을 빠져나가 시내를 향해 달린다. 버스 속의 남자들은 걱정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간다는 분위기에 기대어 그나마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 정관수술 그거 해도 아무 이상 없을까?”

“글쎄 말이야. 나도 이런 저런 얘기들을 들었는데…내 친구 하나는 그 수술하고 나서 허리 디스크 질환에 걸렸다고, 나보고는 그런 것 하지 말라고 말리던데….”

“씨를 빼버리면 그 뭣이냐, 남성성을 잃어버리는 것 아닐까? 왜 그 연속극에 나오는 조선시대 궁중 내시들처럼….”

어느 사이 버스가 시내의 한 비뇨기과 의원 앞에서 멈추더니, 너덧 명의 개구리들을 내려놓고는 다른 병원을 향해 떠난다.

“내가 이래봬도 70년대 중반 어느 해에는, 6개월 동안에 예비군들만 무려 2천4백 명이나 수술을 했다니까요. 우리나라 인구증가 억제에 나름대로 공헌을 했지요.”

인천시 부평역 맞은편에 자리한 <유 비뇨기과 의원> 유태형 원장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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