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한라산 테우리③ 밀과 보리는 ‘볼려야’ 일어선다!

  • 입력 2018.12.09 17: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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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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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중산간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가 망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아서 ‘청년 말’로 키웠다. 하지만 사람도 덩치만 불린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듯, 말도 제 노릇을 하자면 교육이 필요하다.

농부가 선머슴 같은 말을 끌고 찾아간 사람은 왕년에 마을 사람들의 말을 위탁받아서 산으로 몰고 다니면서 목동 노릇을 했던 퇴역 말 테우리다.

그 베테랑 테우리가 설익은 말을 조련하는 데에 교재로 활용하는 도구는 ‘남테’다.

“남테라고, 몰(말) 대신 나무로 만들어서 밭을 볼리는 거야마심. 돈 있는 사람들은 삯 줘서 몰을 빌려다가 밭을 볼리니까 남테가 필요 없지만….”

테우리 출신 송종오 씨의 얘기다. 남녘의 내 고향마을에서는 나무를 깎아서 만든 바가지를 ‘남박’이라 했다. ‘남’은 ‘나무’다. 따라서 ‘남테’는 ‘나무 테두리’라는 뜻인데 커다란 나무바퀴를 칭하는 말이다. 그 남테를 말이 끌고 가게 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바퀴를 매끈하게 만들어야 잘 굴러갈 텐데, 이 남테는 빙 둘러가며 칠팔십 개의 어른 주먹보다 큰 옹이가 박혀 있다. 야생마를 길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만든 기구가 아니라, 농사를 짓기 위해서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농기구다.

그러니까 살림살이가 나은 집에서는 품삯을 주고 한라산의 테우리를 불러, 수십 마리의 말을 동원해서는 얼어붙은 보리밭이나 밀밭을 볼렸(밟게 했)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되는 사람은, 집에서 키우는 말 한 마리로 하여금 남테를 끌고 보리밭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게 함으로써, 여러 마리의 말이 밟는 대신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원주민들은 그 작업을 ‘남테질’이라 했다.

제주도가 따뜻한 지역이라고는 하나, 교래리는 워낙 높은 곳에 자리한 산간마을이다 보니 바람도 거칠게 불고 눈도 많이 왔다. 보리 씨앗을 파종하고 나서 그대로 두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도 하고, 그나마 밭에 남아 있는 씨앗도 땅이 워낙 두껍게 얼기 때문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볼록볼록 혹이 달린 그 남테라는 것을 밭으로 가지고 가서 말이 끌게 하면, 얼어서 붕 떠 있는 땅을 눌러주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그 산간마을 주민들에게 이른 봄, 얼어붙은 보리밭이나 밀밭을 밟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농사 품이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빈한한 집에서는 그렇게 ‘남테질’을 했지만, 형편이 어지간한 집에서는 밭 볼리는 작업, 즉 보리밭 밟는 일을 테우리한테 맡겼다. 마을 사람들의 말들을 도맡아서 한라산으로 몰고 다니면서 관리하는 테우리가, 수십 마리의 말들을 데리고 내려와서는 밭에다 몰아넣고 이리저리 몰고 다니면 보리밭이 단단하게 밟히는 것이다. 그러자면 테우리에게 품삯도 따로 줘야 하고, 음식 대접도 해야 했다.

“부락 주민들이 모여서 밭 볼릴 계획을 미리 짭니다. 오늘은 누구네 밭 볼리고 내일은 또 누구네 밭 볼리고…그게 시기를 잘 못 잡으면 농사를 망쳐요. 돈 좀 있는 사람은 제 때에 밭을 볼리지만 우리 같이 ‘빽’ 없는 사람은 순서가 밀리고….”

그, 참, 그 오지 산간마을에도 빈부의 위계가 엄연했던 모양이다.

보리밭 볼리기를 할 때, 주인은 밭 어귀에다 반드시 제사상을 차려야 한다. 그런데, 그 제사상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 있었다. 제주의 대표적인 수산물인 우럭이라는 생선이다. 평소에 생선 비린내조차 맡기 어려운 산간마을 사람들이었지만, 그날만은 어떻게든 우럭을 구해 와야 했다.

“유세차 정월 스무 엿샛날, 한라산 말 테우리 신령님께 이 잔을 올리나이다. 말도 사람도 다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밭 볼리기를 하기 전에 지내는 제사에서 술잔을 바치는 대상은 남해바다의 용왕도 아니고 한라산의 산신도 아니다. 이미 죽어서 저승으로 간 선배 테우리의 귀신이다.

자, 드디어 한라산의 말 테우리가 수십, 아니 거의 100여 마리에 이르는 말들을 몰고서, 오늘 ‘볼릴’ 아무개의 보리밭으로 진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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