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명상곡이 흐르는 가운데 어르신 10여명이 요가 자세를 취한다. 교수의 크고 또박또박한 음성, 최대한 쉬운 설명, 한 명 한 명 자세를 잡아 주는 이 시간은 사설 학원이나 스포츠센터 프로그램이 아닌 정규 대학의 교양수업이다.
지난 1일 찾아간 경남 거창군 경남도립거창대(거창대) 한 강의실에서는 오전 9시 첫 강좌로 요가 수업이 한창이었다. 학생들이 내내 진지하게 난도 높은 동작을 따라 하는 가운데 “아이고, 안 닿는다”라고 터져 나온 누군가의 한마디에 순간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들은 앳된 새내기 대학생이 아닌 평균 나이 75.8(이하 연나이 기준)세 학생들이다. 문해교육(초·중등 학력 인정)과 일반고(거창읍 소재 아림고)를 거쳐 지난 3월 거창대에 단체 진학했다(16명). 이 가운데 2명은 사회복지학과, 14명은 스마트귀농귀촌학과(귀농귀촌 전공)에 각각 정시와 수시전형으로 입학했다.
이들 가운데 한글부터 배우기 시작해 초·중등을 모두 문해교육 과정으로 마친 이는 10명에 이른다. 3명은 중등과정을 문해교육으로 이수했고, 나머지 3명은 중고교를 다니다 중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최고령자 89세부터 59세 최연소자까지 나이층이 넓지만, 절반 가까이가 80대(7명)고 나머지 대부분이 60~70대(8명)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이들의 열정만큼은 나이를 잊게 한다. 초·중등 학력인정 과정 각각 3년, 교복 입고 청소년들과 함께 3년간 다닌 일반고까지 이들의 배움 기간은 짧게 따져도 10년을 넘어선다.
“배운다는 자체가 신나고 재미있어”
6.25 전쟁으로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쫓겨 가면서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된 사연부터 여러 형제·자매들에 밀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면서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두고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경험 등 사연은 다르지만 이들 대부분은 학령기를 놓친 채 인생 후반을 맞았다.
대학 입학까지 여러 우여곡절에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던 이들이기에 편도 1~2시간에 이르는 등하굣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 대부분은 학교 소재지인 거창읍내에 살지만, 일부는 거리가 꽤 먼 인근 지역에서 등하교한다. 젊은 사람도 쉽게 고단해질 거리이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고단함도 꺾질 못한다. 요가 수업이 끝나자 짐을 챙겨 삼삼오오 강의실을 나서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이 늦깎이 학생들의 표정은 한껏 밝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자 학교를 그만둬야 했던 최월희(77)씨. 50년간 장사하며 아이 셋을 키우고 나서야 다시 배움의 기회를 맞이한 그는 “지금이 최고 행복하다. 배운다는 그 자체가 신나고 좋다. 배우면서 새로운 이들도 알게 되고… 지금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힘줘 말했다.
딸만 다섯인 집에서 셋째로 태어나 평생 농사만 지어온 황순늠(65)씨는 9년 전 한글 공부부터 시작해 대학생이 됐다. 공부하며 가장 힘든 게 “쪼매지만 농사해야 되니깐 집에 오면 복습을 못한다”라는 것일 만큼 배움의 재미에 푹 빠져 산다. 매일 등하교했던 고등학교 때보단 지금이 고단함도 덜하다.
“아침에 학교 가면 다 만내고 새로 교수님들 오시고 뭐든 게 다 재미있다. 원예수업도 너무 재미있고, 코칭도 배우고 다 몰랐던 걸 배우니까. 어려운 게 많아도 하나씩 배워 가니께.” 컴퓨터도 더 배우고 싶고, ‘자꾸 까먹어서 졸업해도 공부는 계속하고 싶다’는 황씨가 말했다.
이처럼 이들에게 배움은 단지 기능을 익히고, 지식을 얻는 것만이 아니다. 삶에 활기와 즐거움을 얻고 자기 삶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장이다. 살면서 서러웠던 이야기, 가슴 아팠던 사연 등 저마다의 인생 역정은 물론 꿈과 바람, 생활의 재미 등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서로 들어 준다. 수업과 학교생활 등에서 이러한 장들이 펼쳐진다. 아울러 이들은 수업에 나오지 못하는 동료가 있으면 함께 찾아가 안부를 묻고 밥을 같이 먹고, 몸이 불편하면 부축해 주면서 서로를 돌보기도 한다. 배움과 돌봄의 공동체인 셈이다.
거창 교육 주체들의 내일은?
이 같은 평생교육 체계가 가능했던 건 거창군과 지역학교(아림고·거창대)의 협력 덕분이다. 거창군은 지난 2003년 경남도에서 처음으로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된 뒤, 초·중등학력 인정과정(각각 2015·2019년)을 시작하며 관련 제도를 꾸준히 시행했고, 교육이수자들이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림고와 거창대의 동참을 끌어냈다. 학교들도 고령인 이들의 교육과정과 학교 적응, 학령기 학생들과의 조화 등 어려운 과제를 하나씩 해결해 가며 응답했다.
김광선 거창군 인구교육과 계장은 “전국 대학에 만학도 교육과정은 많지만, 국가가 운영하는 초·중등학력 과정까지 아우르는 사례는 없는 상황”이라며 “이런 가운데 지자체는 학력인정 과정을 지원하고, 일반고는 문을 열어 교육 기회를 제공하며, 지역의 국공립대학인 거창대까지 이에 발맞춰 줌으로써 이뤄진 결과다. 거창군이 교육도시여서 가능했다”라고 전했다.
지난 1일 만학도들과의 차담 자리를 마련한 김재구 거창대 총장은 “여러분이 평생교육의 귀감이다. 행복하시면 좋겠다”라며 “만학도 과정은 올해 첫 시도라 부담스럽기도 하고 책임감도 느끼지만, 이분들의 존재가 고맙다”고 격려했다. 30분가량 이어진 대화에서 학생들과 격의 없이 소통한 김 총장은 “학생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운영철학과 “거창대를 평생교육의 메카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 총장은 “농업이 살아야 지역이 살고, 정주 여건을 만들어야 사람이 돌아온다. 평생교육이 지역사회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바탕이 될 수 있다”라며 “전국에서 배움에 한이 된 분들은 거창군으로 오시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