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한이 됐어. 자꾸 배워서 아는 게 제일 원이지”

예천군노인복지관·거창군 성인 문해교실 노인 교육생들 이야기

  • 입력 2023.04.23 18:00
  • 수정 2023.04.23 20:09
  • 기자명 김수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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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지난 17일 경북 예천군노인복지관에서 열린 성인 문해교실에서 70~80대 교육생들이 한글 자음과 그에 맞는 자음자의 이름을 선으로 잇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7일 경북 예천군노인복지관에서 열린 성인 문해교실에서 70~80대 교육생들이 한글 자음과 그에 맞는 자음자의 이름을 선으로 잇고 있다. 한승호 기자

“학교 조금 댕겨서 알긴 해도 국문은 받침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농사짓느라 배우기 힘들었지. 모르면 죽는 날까지 배워야지. 애들한테 편지도 쓰고 싶고 즐겁잖아?”(김익준, 93)

“나이를 생각하면 내일 죽을 거(웃음) 고만 나오고 싶은데, 글을 생각하면 그래 하고 싶어. 노는 거보다 좋아. 나이가 원수지. 공부 못한 게 한이 돼. 아(아이) 놓고 어른 밑에 있을 땐 공부하러 못 나오지. 선생님이 억수로 좋은데, 먼 데 와서 진짜 애 잡순다.”(김영이, 84)

“항상 한이 됐어. 자꾸 배워서 아는 게 제일 원이지. 이젠 읽는 건 되는 데 쓸 수도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게 제일 애닯지. 그래도 이젠 노래방에서 나오는 거 다 부르고, 차 타고 어디 가고, 간판 보고, 그것만 해도 낫지.”(권오영, 79)

“이 나이 되도록 참 못 배워서 손을 벌벌 떠니까 선생님이 ‘할 수 있습니다. 꼭 쥐고 요래요래 쓰세요’해서 그래그래 배웠지. 요만할 때부터 밥해 먹고 일하고 평생을 그래 살다, 한글 배우고 나니 요새는 ‘어르신 얼굴 확 피었다’ 해. 시집 어이 살았는가, 내 클 적에 동생들 업어 키우고 들에 밭매러 가고 이런 거 다 쓰고 싶은데 아직은 글씨가 안돼.”(이옥름, 78)

“맘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좋지.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고 사는 게 너무 바빴어. 사는 덴 지금이 참 좋아. 글도 쓰고 책도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좋겠어. 일기도 오래 썼고 그림도 그려. 내 맘 속에 한이 자리 잡고 있고 아직 부족해서 계속 배워.”(윤월규, 77)

지난 17~18일에 걸쳐 찾아간 예천군노인복지관과 거창군 신원면 내동마을 경로당에서 진행된 성인 문해교실 교육생들의 이야기다.

경북 예천군노인복지관(예천군 수행기관)은 지난 2011년 성인 문해과정을 처음 시작했다. 올핸 47명이 과정에 등록했고, 그 가운데 6명은 신규 등록자, 나머지는 적게는 2년부터 7년까지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요일별로 5개 반을 운영한다.

경남 거창군은 2005년 12개 읍·면 마을로 찾아가는 한글교실을 시작해 17년간 성인 문해교실을 운영하며 405개 교실, 6,551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 이 공로로 지난해 교육부 장관 성인 문해부문 표창도 받았다. 현재는 찾아가는 문해교실 16개소와 학력인정과정 6개소를 운영한다.

17일 오전 수업을 위해 아침 6시 반에 집을 나섰다는 권오영씨는 버스가 몇 대 없어 집에 돌아가려면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지만 4년째 계속 배운다. 김영이씨는 면까지 나가 배우다 지난해부터 일주일에 두 번 마을 경로당에서 진행되는 찾아가는 문해교실에서 ‘먼데 다니느라 욕보는 억수로 좋은’ 선생님과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김익준씨는 아픈 아내가 혼자 있는 것이 맘에 걸려 고령에도 오토바이에 아내를 태워 함께 온다. 글을 모른다는 창피함에 긴장한 나머지 몸을 떨던 이옥름씨는 문해교실 작품으로 경북도에서 주는 최우수상까지 받게 됐다. 술술 쓰진 못하지만 20년 가까이 일기를 써온 윤월규씨는 ‘아무 소릴 해도 다 받아주는, 가장 친한 친구보다 더 소중한’ 일기를 지금도 종종 쓰면서 ‘되도 안 하지만 내 생각나는 대로’ 시도 쓴다.

이들은 글을 몰라 답답하고 주눅 들었던 세월을 지나 이제는 읽고, 쓰고, 그리며 자신의 삶을 표현해가고 있다. 아울러 문해교육은 단지 글자를 읽고 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 교육 과정에서 자기 삶을 인식하고 이를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을 확장하고 삶의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천군노인복지관 교육생들은 자신의 시화 작품에서 “나에게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박종순씨)”, “농사일 때문에 매일매일 출석하는 모범 학생은 아니지만 일흔 살에 학생인 나는 공부하러 가는 길이 참 좋다(양재분씨)”, “아무리 농사일이 바빠도 나는 공부하러 간다. 늦은 나이지만 공부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서 나는 공부하러 간다. 세상과 소통하는 날을 꿈꾸며 나는 공부하러 간다(권오영씨)”, “한글을 알게 되니 답답한 마음도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권분희씨)”라고 고백한다.

이들은 적지 않은 나이와 건강상 어려움, 생업, 불편한 대중교통 여건 속에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고 기쁨을 누리고 있다.

함영균 예천군노인복지관 사회복지사는 “2019년 봄쯤 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였는데, 비 오는 어느 날 한 어르신이 장화 신고 버스 타고 수업에 오신 적이 있다. ‘이건 배우고 가서 일해야겠다’고 하셨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이들의 뜨거운 학구열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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