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전국 배 농가들이 지난 4일 정부세종청사 앞 차가운 아스팔트로 나섰다. 지난가을까지 지속된 폭염으로 수확한 배에서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지만, 실효성 있는 구제 대책이 전무해서다.
배 주산지 전남 나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폭염재해 일소피해 배농가 비상대책위원회(대책위)’와 폭염·일소피해 전국배농가 연대회의가 농림축산식품부 앞에서 전국 배농가 대표자대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온 농민 300여명(경찰 추산 200명)은 농식품부가 ‘폭염·일소(햇볕 데임) 피해’를 자연재해로 즉각 인정 및 일괄 보상하고 농작물재해보험 피해조사 방식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밤사이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로, 준비됐던 방송 차량마저 현장에 도착하지 못해 마이크도 없이 진행된 이날 대회에서는 배 피해를 포함한 기후재해 대책에 손을 놓은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과 반헌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날 선 비판까지 쏟아졌다. 참가자들은 배 피해 대책 구호에 연이어 ‘윤석열·송미령 퇴진’을 촉구했다.
이날 발언에 나선 농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정부의 농업재해 대책과 재해보험의 문제가 무엇인지 확실해진다.
“행정은 과연 무엇을 했나? 피해 증상이 8월부터 나타났고, 폭염 경보까지 이미 발효됐지만 추석 전후까지도 실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와 ‘(수확이 끝났으므로) 피해 조사를 어떻게 하느냐’라고 나오는 게 중앙·지방정부가 할 말인가(농민 김성보씨).”
“이미 배를 다 딴 뒤에 찾아온 보험 조사자가 (피해율을) 0%로 해달라기에 내용을 확실히 몰라서 서명해 주고 말았다. 막상 배 봉지를 까보니 30~50%까지 상해 있었다. 이에 다시 조사를 나와달라 했으나 이미 끝나서 나갈 수가 없다고 했다. 과연 농민을 위한 보험사인지 화가 치민다. 전면 개정하지 않으면 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농민 이은주씨).”
이상 징후에도 제때 피해 실태 파악조차 나서지 않은 농정당국과 작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재해보험 조사 방식 및 피해율 산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배는 봉지를 씌워 재배하므로 수확 뒤 봉지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피해가 발견될 수밖에 없고, 폭염과 일소는 저장 뒤에도 지속해서 영향을 미쳐 피해 과실이 계속 생겨나지만 피해 조사 과정에서는 이를 전혀 감안하지 않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해 이날 농민들은 투쟁 결의문에서 “배나무에 배가 달리지 않아(수확 완료) 피해를 확인할 수 없다는 말만 계속할 것인가. 피해 발생 초기에 행정력을 동원해 폭염과 일소 피해를 막아 내지 못한 것은 송미령 장관의 농정 실패”라며 “설 명절용 저장 배에서도 피해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번 재해에 대한 특단의 대책과 경영안정지원이 필요하다”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수확기에 실시한 일소피해 배 보험조사는 원칙이 없고 객관성·신뢰성도 상실했다”라며 “보험 가입자의 50% 이상이 조사조차 받을 수 없는 배 보험조사는 무효”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나주의 경우 보험 신고 농가의 약 50%가 이미 수확을 마친 상태인 데다 낮은 피해율 책정에 항의하며 피해 조사를 거부하고 있다. NH농협손해보험이 작성한 전국 배 피해 현황자료에 따르면(10월 20일 기준), 지역별 배 일소 피해 접수율(가입농지 수에 대한 접수농지 비율)은 전남 71.4%, 전북 16.7%, 기타지역 11.6%, 경북 10%, 충북 9.3% 등 순이다. 이 가운데 특히 나주는 80.2%에 이른다.
농민들이 보험조사를 거부할 만큼 반발이 큰 것은 현행 조사 방식이 일소 피해의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해서다. 올해 나주 지역에서 시행된 방법은 낙과피해조사 방식인데, 표본이 되는 나무를 3주 이상 선정해 일소 피해 과실 개수를 구하는 방법(수확 전 실시)이다. 문제는 일소 피해 특성상 피해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햇볕에 덴 부분이 썩고 물러지면서 과실 전체 부위로 번져 가는데, 이 때문에 조사 시점에서 책정된 피해율과 실제 피해율의 괴리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농가들에 따르면 실제로 추석 이후 수확·선별해 보관 중인 배(폐기율 30% 이상)와 수출 배(비상품 과실 60% 이상)에서 피해가 계속되는 실정으로 파악된다.
아울러 일소 피해 배는 가공용으로도 쓸 수 없어 전액 농가 피해가 된다. 이에 현장에서는 일소 피해 과실의 경우 현재처럼 피해율을 구분해 산정(50·80·100%)하지 말고 고정 비율(예 80%)로 정하고 보장 기간 역시 보험 전 기간(현재 적과 종료 이후만)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이날 농민대표단은 농식품부 재해보험정책과와 면담하고 재해보험 개정 관련 설문지 및 농가 요구안 등 총 800명이 연명한 서한을 전달했다. 면담 뒤 대회장에 나온 농식품부 담당자가 “충분히 (개선을) 검토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겠다”라고 밝히자, 여기저기서 “하나 마나 한 말이다”, “보상할 건가 안 할 건가. 약속하고 들어가라”라는 농민들의 원성과 야유가 쏟아졌다. 대책위는 농식품부에게 12월 중 장관과 농민대표단과의 면담 자리를 마련하고 관련 대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한 상태다.
“농식품부는 폭염·일소로 인한 재해대책을 단 하나도 강구하지 않았다. 배뿐 아니라 올해 많은 농작물이 자연재해를 입어 농민들은 자식 같은 농작물을 떠나보내며 가슴 아파하는데도, 지역농협 조합장들도 누구 하나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대통령도 장관도 조합장도 농민 곁엔 없다.” 면담에 참석한 김성보 대책위 집행위원장이 성토했고 이어 농민들은 일소 피해로 까맣게 멍들어 썩어 가는 배를 농식품부 정문 앞에 쏟아냈다.
대책위는 확실한 재해대책 마련과 배 보험 전면 개정이 이뤄질 때까지 농정당국을 압박하면서,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배 보험 가입 거부운동까지도 불사할 것임을 내비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