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 등의 영상물을 제작할 때 ‘로케이션 헌팅(location hunting)’이라는 말을 쓴다. 시나리오에 맞춤한 야외촬영 장소를 찾는 일이다. 그런 거창한 용어를 쓰지 않을 뿐, 용두산공원에 사진 찍으러 나온 관광객들이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사진을 촬영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공원 사진사에게 돈을 지불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바에.촬영장소로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이 ‘꽃시계 앞’이었다는 사실이야 앞서도 언급했었는데,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받아든 사람들이 한 결 같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대목이 있다.-꽃이 암만 이쁘면 뭐 하노?
-이보라우, 15번! 그 자리 15번이 혼자서 전세냈간? 빨리빨리 찍고 비키라우!-나는 오늘 여기서 처음 찍는데 와 그리 성화를 합네까?-이것 차암… 가위바위보를 해서 순번을 정하든지 해야지 안 되갔네.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사진 찍을 장소로 가장 인기가 있던 꽃시계 앞에서 벌어지는 소란이다. 더구나 그 곳은 장소가 협소해서 세 팀이 한꺼번에 찍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30명의 사진사들이 제가끔 고객을 데리고 와서는, 서로 꽃시계를 차지하려고 다투다보니 사진이 맘먹은 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드디어 용두산공원 사진사들이 시내 음식
송도공원에서 관광객 대상으로 사진영업을 하던 피란민 출신의 이상훈이, 그 활동무대를 용두산공원으로 옮겼다. 서른 명의 허가받은 사진사들 중 결원이 생겨서 용케 한 자리를 물려받은 것인데, 운 좋게도 ‘1번’이었다.자, 이제 ‘용두산공원 1번 사진사’라는 완장을 찼으니 영업 준비를 해야 한다. 공원 안의 좋은 배경을 골라 찍은 사진으로 관광객들을 ‘유인’하기 위한 견본을 만드는 일이다. 동료가 이런저런 사진들을 붙인 판때기 하나를 갖다 준다.-자네 선임자가 서울로 이사 가면서 두고 간 사진 견본인데, 이래봬도 이 판때기에 붙은 사진의
이북에서 내려온 삼사십대의 실향민들이 사진영업을 해서 먹고 살겠다고 용두산공원으로 몰려든 데에는, 카메라 한 대와 사진기술만 있으면 별 밑천이 없이도 밥벌이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공원을 찾은 사람들에게 사진 값 일부를 선금으로 받은 다음, 부산 시내의 사진현상소에 맡겼다가 찾아다 주면 되었다. ‘영업방식’이 이처럼 단출하다 보니 마땅한 생계방편을 찾지 못 하고 있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고…결국 사진사들 자신이 질서를 잡겠다고 나섰다.-우선 공원에서 영업할 수 있는 사진사들의 숫자를 제한해야 합네다. 어드런 때에는 이 좁은 공원에
‘인테리어’라는 말은 언제부터 우리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었을까? 아마도 우리의 주거형태가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거기 걸맞은, 제법 고상해 뵈는 그 외래 말이 장식으로 도입되었을 터이다. 그렇다고 빈한한 시절의 상징이었던 우리네 초가삼간이라고 해서, 실내장식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초가집이든 양철집이든 기와집이든…일단 시골집 안방 문의 문고리를 당겨 열고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벽면의 상단에 떠억 버티고 있는 그것, 사진틀이다.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한 신랑 신부의 모습이 사진틀 하나를 차지하고, 한 옆으로 친척과 하객이 함께 찍은 단체
1960~70년대에 서울에 처음 올라간 시골사람들이, 본격적인 ‘서울 살이’에 앞서서 시가지 구경을 위해 일단 먼저 오르던 곳이 남산이었다. 남산에 처음 올랐을 때 나는 이런 탄성을 내질렀다. “야, 집들 많다!”부산의 용두산은 서울로 치면 남산과 같은 곳이다. 용두산공원에 오르면 크고 작은 배가 부단히 드나드는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중앙동, 광복동, 남포동 등 부산의 중심거리가 발밑에 놓인다.2001년 8월에 취재차 용두산공원에 올랐다.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공원은 산책 나온 시민들로 활기가 넘쳤다.
1950년 6월,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이 되자 북녘으로부터의 피란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전쟁이 끝나자 오갈 데 없는 피란민들은 우선 급한 대로 청계천 쪽으로 몰려들어서는, 양쪽 석축 위에다 다투어 판잣집을 지었다. 이제는 천변풍경이 거대 판자촌 군락으로 바뀐 것이다.개천가에 얼기설기 만든 판잣집에서 생활해야 했던 피란민들의 고충이야 새삼 말해 무엇 하랴. 그러나 그 때부터 청계천도 더불어 된 몸살을 앓게 되었다.“청계천을 따라 거의 전 구역의 양쪽 편으로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지요. 빈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
정월 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한 해의 건강을 기원하며 견과류를 깨물어 먹는 세시풍속이 있었는데 이를 부럼이라 했다.「동국세시기」에는 이 풍습을 ‘이른 새벽에 날밤·호두·은행·무 등속을 깨물면서 일 년 열두 달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축수하였다’라고 풀이하면서 부럼을 ‘작절’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씹을 작(嚼)’자에 ‘부스럼 절(癤)’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럼이라는 말이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깨문다’는 뜻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부럼은 견과류를 깨물어 먹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
청계천에 겨울이 왔다.눈발이 날리고 흐르던 물이 얼어붙으면, 천변 아이들은 너나없이 청계천으로 내려가서 썰매도 타고 팽이도 쳤다. 그런 모습이야 어느 지역의 하천을 가나 공통으로 만날 수 있는 풍경이었으니 특별나다 할 것은 없었고….이성선 원장은, 천변 사람들이 즐기던 여러 겨울 놀이 중에서 단연 백미는 청계천의 다리 위에서 열띤 각축을 벌였던 연싸움이었노라 회고한다. 연을 날리는데 중요한 조건은 두 말 할 것 없이 바람이다. 그런데 주변 마을에는 바람 한 점 없는 날도, 청계천 다리에만 올라서면, 주교동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개천을
청계천에 아연 활기가 넘쳐나는 시기가 있었다. 여름철, 장마로 큰물이 지는 때다.평소엔 전체 개울 폭의 3분의1 정도만 차지하며 흐르던 개천물이 큰물이 지면 불고 불어서, 가장자리에 쌓아놓은 석축의 턱밑까지 차오른다. 사람들은 천변도로에 나와서 흙탕물이 무서운 기세로 내달리는 모습을 구경한다.-어, 저것 좀 봐. 뉘 집에서 개집이 떠내려 오고 있어. 아이고, 강아지가 그 위에 올라 앉아 있는데?-저건 또 뭐야! 누구네 집 지붕이 통째로 떠내려가네!초가집 지붕이 흙탕물에 휩쓸려 내달리기도 하고, 닭장이나 개집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어
1960~70년대만 해도 서울의 빈민촌엔 비새는 판잣집이 허다했다. 하물며 우리의 주인공인 이성선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30년대라면 말해 무엇 하겠는가?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시절에 청계천변에서 구걸을 해서 끼니를 이어가던 걸인들의 집은, 오히려 지붕이 매우 튼튼했으므로, 천장에서 비샐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청계천의 다리가 스무 개가 넘었는데 그 다리들마다 양쪽 가장자리에는 어김없이 거지들이 움막을 만들어놓고 살았어요. 다리 상판(床板)을 지붕 삼고 교각을 기둥 삼아서 거적뙈기를 둘러치고는, 그 안에다 솥단지를 걸어놓고
이성선 할아버지는, 천변 둔치의 모래밭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땀이 나면 청계천 물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들었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글쎄, 그가 소년기를 보냈던 1930년대라면, 하수처리 시설이 전혀 갖춰져 있지도 않았을 터이고, 따라서 천변 가정집들의 온갖 오폐수가 청계천으로 흘러들었을 텐데…과연 멱을 감을 수 있을 만큼 깨끗했을까?그 시절 청계천 인근 예지동의 주택가에서 남자들이 둥근 나무통을 양쪽에 매단 지게를 지고서, 골목을 누비며 이렇게들 외친다.-거름 칩니다! 거름 쳐요! 거름들 치세요!거름을 치라니, 무슨 소릴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