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한 해의 건강을 기원하며 견과류를 깨물어 먹는 세시풍속이 있었는데 이를 부럼이라 했다.「동국세시기」에는 이 풍습을 ‘이른 새벽에 날밤·호두·은행·무 등속을 깨물면서 일 년 열두 달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축수하였다’라고 풀이하면서 부럼을 ‘작절’이라고도 했다는 기록을 덧붙이고 있다. ‘씹을 작(嚼)’자에 ‘부스럼 절(癤)’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럼이라는 말이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깨문다’는 뜻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부럼은 견과류를 깨물어 먹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정월 보름날 씹어 먹는 견과류 그 자체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서울토박이인 이성선 할아버지에 따르면, 1930~40년대에 정월대보름을 앞두고 종로통의 노점에 나가보면, 땅콩이나 호두를 파는 상인들이 “보름 사세요! 보름 들여가세요!”라고 외쳤다고 회고한다. 부럼을 서울 사투리로 ‘보름’이라고도 했다는 얘기다. 그 시절 장보러 나온 한 주부를 따라가 보자.
-아주머니 보름 사세요. 보름 안 사요? 호두도 있고 땅콩도 있어요!
-땅콩 반 되하고 호두 조금만 주세요. 아, 그런데 제웅은 없나요?
-제웅이 다 팔렸는데…아, 여기 하나 남았네요.
“제웅이 뭐냐면…지푸라기를 묶어서 만든 인형 같은 것이에요. 정성을 들여서 매끈하고 곱게 만든 게 아니라, 몸뚱이하고 팔다리 등 사람의 형상만 흉내 내어서 그냥 어설프게 대충 만든 거지요. 그런데 대보름을 앞두고 그 제웅을 집집마다 다 샀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고요….”
사극에서 누군가를 저주할 때 짚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서 바늘로 찌르는 장면을 더러 볼 수 있는데, 볏짚으로 만든 그 사람의 형상이 제웅이다. 집안 식구 중에서, 새로 맞이하는 그 해가 액년(厄年)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만 제웅을 준비한다. 그 제웅에다 액년에 든 해당 가족의 출생년도의 간지를 적어서 끼워놓고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드디어 정월 열 나흗날 밤, 동네 아이들이 문밖에 몰려와 입을 모아 외친다.
-보름이나 제웅 주세요! 보름이나 제웅 주세요!
그러면 보통의 집에서는 주부가 대문 열고 나와서 땅콩이나 은행 따위를 건넨다. 아이들은 다음 집으로 옮겨가서 또 보름이나 제웅을 달라고 합창을 한다. 이번에는 주부가 부럼과 제웅을 함께 가지고 나온다.
-얘들아, 잘 왔다. 액땜 잘 되라고, 내가 제웅에다 2전짜리 두 개를 꽂아주마.
짚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즉 제웅을 아이들에게 건네면서 주인은 엽전을 제웅의 지푸라기 사이에다 끼워서 건넨다. 액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형편이 좀 나은 집은 10전짜리를 끼워주기도 했다. 이렇듯 보름 하루 전날 밤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제웅과 돈을 달라고 하는 그 행위를 일컬어 제웅 친다, 혹은 제웅을 치러 다닌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돈을 얻을 욕심에 사람 형상의 지푸라기 인형을 받아든 아이들은, 그 제웅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달밤, 천변 아이들이 모여서 그날 밤의 ‘제웅치기’를 결산한다. 어느 아이는 5전밖에 못 벌었다고 투덜거리고, 다른 아이는 10전이나 벌었다고 좋아라한다.
-그런데 이 제웅들은 이제 어떻게 하지?
-그러게. 집에 갖다 놨다가…혹시 귀신이 나오면 어떡해?
-그걸 집에 왜 갖고 가냐. 저기다 버리면 되겠지 뭐. 자, 뉘 집 제웅인지 몰라도 잘 가거라!
아이들은 돈을 빼먹고 난 그 귀찮은 제웅들을 천변의 모래밭에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내려다보니 청계천 모래밭에는, 불놀이를 하고 버린 깡통들과 함께 무수한 제웅들이 흉측하게 나뒹굴고 있더라고 이성선 씨는 회고한다. 그러니까 청계천은, 개천가에 살던 무수한 사람들의 재액(災厄)까지도 묵묵히 품어 안고 그렇게 흘러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