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겨우내 창고에 보관해뒀던 빈 모판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일괄 자동 파종기는 빈 모판 위에 쉴 새 없이 상토를 깔고 볍씨를 뿌려댔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농민들이 빈 모판을 나르고, 상토를 붓고, 살균-살충 육묘상처리제와 포대에 담긴 종자용 오대벼를 파종기에 채워 넣었다. 파종기를 거쳐 완성된 모판은 사륜구동의 운반기에 실려 인근의 논으로 옮겨졌다. 농민들은 앞서 봄비로 인해 질퍽거렸던 논을 평평하게 고른 뒤 햇볕과 바람에 이틀 동안 잘 말렸다.바야흐로 봄이다. 올해도 농민은 볍씨를 뿌린다. 만고의 진리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보름 전 씨앗을 뿌린 모판엔 고추 모종이 매우 촘촘히 자라 있었다. 손가락 두세 마디 크기로 자란 연두색 모종은 한눈에 보기에도 튼실했다. 옹기종기 붙어있는 고추 모종을 모판에서 조금씩 떼 내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상토를 털었다. 그리고선 모종을 하나씩 차례로 분리해 원형 그릇에 가지런히 놓았다. 어루만지는 그 손길이 꽤 조심스러웠다.50개 혹은 72개의 구멍이 있는 포트에 상토를 가득 채웠다. 앞서 조심스레 떼 낸 고추 모종을 다시 하나씩 포트에 심었다. 나무젓가락으로 상토에 틈을 만들고 그 자리에 모종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본격적인 설 명절 연휴를 닷새 앞둔 지난 24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위치한 서귀포안성우체국 앞은 인근 농가에서 가져다 놓은 수백여 개의 택배 상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를 위한 노동조건 개선, 사회적 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전면 파업에 나선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들의 파업이 해를 넘겨 이어지며 한라봉과 레드향, 천혜향 등 만감류 출하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지자 설 대목을 앞둔 농민들이 우체국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택배노동자들의 파업에, 설 명절 출하 물량까지 일시에 몰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이 늙은이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부끄러워. 그래도 지금껏 80년 가까이 살아온 마을을 없앤다는 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적은 힘이라도 보태야지.”소한을 앞두고 매서운 한파가 찾아온 4일 오전 10시, 충북 진천군청 앞에서 만난 신옥순 할머니는 두툼한 외투에 붉은 모자와 머플러를 하고 털장갑을 낀 채 2단으로 쌓은 파렛트 위에 앉아 있었다. 올해 아흔다섯, 마을 최고령자인 할머니는 다른 이웃주민과 마찬가지로 ‘농지 위에 산단 개발 즉각 중단’이 적힌 손팻말을 목에 걸고 있었다.앞서 오전 9시, 유주영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머리를 밀었다. 대중 앞에서 삭발에 나선 멋쩍음에 잠시 어색한 웃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웃음기는 사라지고 침통한 표정이 만면에 역력했다. 머리 앞·뒤·좌·우로 이발기가 움직일 때마다 희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무대로 떨어졌다. 이 모습을 보는 농민들 사이에선 안타까움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삭발은 순식간에 끝났다. 민 머리엔 ‘나락 시장격리 즉각 실시!’가 적힌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맸다.지난 8일 전남 영암군청 앞에서 ‘나락값 보장을 위한 시장격리 촉구 영암군 공동행동’이 펼쳐졌다. 전국쌀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농민기본법 제정, 식량주권 실현, 농지를 농민에게, 기후위기 대응, 공공농업으로 전환 등을 촉구하며 ‘2021 전국농민총궐기’ 성사를 위한 전국 농민들의 트랙터대행진이 지난 8일 최남단 제주도에서 시작됐다.전국을 동서로 나눠 전남 해남, 경남 진주로 상륙해 행진을 이어간 농민들은 지난 10일 트랙터 50여대, 차량 200여대를 이끌고 나와 나주-광주-영광, 합천-성주로 북상하며 적폐농정을 청산하기 위한 대행진에 적극 동참했다.박흥식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대행진은 농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말 그대로 종횡무진, 비탈진 밭을 오르내리며 고구마를 캐느라 온 사방을 누비고 다닌 박순애(70)씨의 옷은 붉은 황토로 뒤범벅돼 있었다. 박씨가 지나온 자리 중간중간마다 쌓여 있는 고구마가 수북했다.남편인 김내숙(76)씨는 고구마 줄기와 엉켜 밭에 박혀 있는 비닐을 걷어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검은 비닐을 확 잡아당길 때마다 붉은 황토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 아름씩 모인 비닐은 밭 귀퉁이에 차곡차곡 모았다.이렇다 할 일손 없이 부부의 힘만으로 700평에 조금 못 미치는 밭에서 비닐을 걷어내고 고구마를 캐기까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강원도의 험준한 산세를 배경으로 눈 앞에 펼쳐진 사과 열매의 붉은 빛깔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껴 날은 흐릿했지만 홍로의 붉은 빛깔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세차게 때로는 간간이 흩뿌린 가을비로 인해 물방울이 맺힌 사과엔 생기마저 감돌았다.“한 번 맛보실래요?” 젊은 농부가 건넨 한마디를 놓칠세라 염치도 내려놓고 거의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건넨 사과를 손으로 쓱싹, 몇 번 문지른 뒤 덥석 베어 물었다. 홍로 특유의 달콤함이 ‘짜르르’하게 입안에 감돌았다. 과즙이 풍부했고 신맛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비 오듯 흘린 땀을 식히려 들어 온 하우스에서 그가 휴대폰 액정화면을 보여줬다. 농협의 입금 알림 문자였다. ‘호박(1,681kg) 출하대금, 1,036,440원 입금’ 그가 부연을 해줬다. “애호박 8키로(kg), 200상자에 100만원 받은 거죠.”애호박 한 상자(20개들이)당 5,000원, 그게 그가 바깥에 나서기가 두려울 정도로 폭염이 극성을 부리던 7월 마지막 주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 받은 애호박 성적표였다. 하우스에 둔 선풍기가 더운 공기를 끌어모았을까, 땀은 식지 않고 더위는 쉽게 가시지 않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씨줄 날줄로 촘촘히 엮인 고정지주대 유인줄을 따라 자란 오이 넝쿨이 사람 키만큼이나 크다. 허리를 숙여 무성한 오이 넝쿨 사이로 얼굴을 넣어 밭을 살핀다. 이내 노각오이를 찾아 꼭지를 자른다. 그렇게 두세 개를 수확해 한 모둠씩 모으며 조금씩 이동하니 농민들의 손길이 머문 자리마다 노각오이가 놓여 있다.몸집 좋은 성인 남성의 팔뚝, 혹은 그보다 손 한 뼘가량 더 큰 노각오이가 특유의 노란 빛깔과 무늬를 선보이고 있다. 씨앗을 파종하고 모종을 정식한 지 한 달 보름여 만에 첫물을 수확하는 농민들의 얼굴에 구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마늘 수확에 나선 농가 섭외를 위해 이태문 마늘의무자조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에게 연락을 취한 뒤 답변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이 사무국장은 문자로 주소와 함께 당부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요즘 일손이 너무 귀해 많이들 바쁩니다. 온 듯 안 온 듯 사진 찍고…” 단, 두 문장이 주는 행간의 의미를 곱씹으며 경남 의령군으로 향했다.한낮 기온이 30도를 넘나들며 초여름 무더위가 찾아온 지난 7일 부림면 여배리 들녘 곳곳에선 마늘 수확이 한창이었다. 이제 막 수확을 시작한 들녘엔 2~3일 전에 캐내 말려놓은 마늘이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소 두 마리의 목덜미에 보기에도 묵직한 ‘겨리’를 매달았다. ‘겨리’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뜻한다. “이랴이랴~” 농사 경력만 50여 년, 머리 희끗희끗한 농부의 익숙한 손길과 소모는 소리에 느릿느릿하지만 힘찬 소걸음이 시작됐다. 그러자 두 마리 소 사이에 놓인 겨리가 물 댄 논의 바닥을 힘차게 갈며 앞으로 나아갔다. 농부의 구성지고 걸쭉한 소모는 소리가 들녘 너머로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지난 10일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성산리 들녘에서 겨리소 써레질 및 전통 손 모내기 행사가 열렸다. ‘홍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