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흔다섯 신옥순 할머니가 한겨울 거리에 선 까닭

진천 사당마을 주민들, 해 넘긴 농지 위 산업단지 반대 농성

  • 입력 2022.01.09 21:05
  • 수정 2022.01.09 21:22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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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흔다섯, 신옥순 할머니가 지난 4일 충북 진천군청 앞에서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 반대 농성에 참여하던 중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언 몸을 녹이고 있다.
올해 아흔다섯, 신옥순 할머니가 지난 4일 충북 진천군청 앞에서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 반대 농성에 참여하던 중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언 몸을 녹이고 있다.
소한의 추위에 두툼한 옷을 껴입은 진천 사당마을 주민들이 군청 앞에서 갖가지 내용의 손팻말을 목에 건 채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농성 중인 주민들 모습 뒤로 군의회 정문에 새긴 ‘군민 행복’이란 글자가 뚜렷이 대비돼 보인다.
소한의 추위에 두툼한 옷을 껴입은 진천 사당마을 주민들이 군청 앞에서 갖가지 내용의 손팻말을 목에 건 채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농성 중인 주민들 모습 뒤로 군의회 정문에 새긴 ‘군민 행복’이란 글자가 뚜렷이 대비돼 보인다.
김기형 반대대책위원장(왼쪽)과 진천 사당마을 주민들이 군청으로 출발하기 전 마을 입구에서 만나 인사하고 있다.
김기형 반대대책위원장(왼쪽)과 진천 사당마을 주민들이 군청으로 출발하기 전 마을 입구에서 만나 인사하고 있다.
김기형 반대대책위원장이 진천 사당마을 앞 들녘에 놓인 ‘공룡알’에 ‘산업단지백지화 결사저지투쟁’이라고 적고 있다.
김기형 반대대책위원장이 진천 사당마을 앞 들녘에 놓인 ‘공룡알’에 ‘산업단지백지화 결사저지투쟁’이라고 적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이 늙은이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부끄러워. 그래도 지금껏 80년 가까이 살아온 마을을 없앤다는 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적은 힘이라도 보태야지.”

소한을 앞두고 매서운 한파가 찾아온 4일 오전 10시, 충북 진천군청 앞에서 만난 신옥순 할머니는 두툼한 외투에 붉은 모자와 머플러를 하고 털장갑을 낀 채 2단으로 쌓은 파렛트 위에 앉아 있었다. 올해 아흔다섯, 마을 최고령자인 할머니는 다른 이웃주민과 마찬가지로 ‘농지 위에 산단 개발 즉각 중단’이 적힌 손팻말을 목에 걸고 있었다.

앞서 오전 9시, 유주영 진천 사당마을(충북 진천군 이월면) 이장은 마을회관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군청 앞 농성에 참여할 주민은 마을 입구에 모여달라”고 방송했다. 현재 총 10가구가 살고 있는 사당마을에서 타지로 일 나가는 주민들을 제외하고 가구 대표로 총 9명이 모여 차량 3대에 나눠 타고 군청으로 향했다. 유주영 이장은 군청 앞 농성을 시작한 이후로 아침방송과 군청 출·퇴근은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 반대 군청 앞 농성은 지난해 11월 첫날부터 시작됐다. 수요일을 제외한 평일은 군청 앞 농성으로, 수요일은 마을 인근인 이월터미널에서 산단 반대 선전전으로 확장됐고 주민들의 직접 행동은 해를 넘겨 새해에도 이어졌다. 주민들이 목에 걸거나 손에 든 선전물은 꾸깃꾸깃하거나 일부가 찢어진 채로 농성과 선전전을 이어온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군청 앞에 설치한 천막에서 플라스틱 의자와 산단 반대 선전물, 현수막 등을 꺼냈다.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 반대대책위원회(반대대책위) 명의로 된 ‘단 한평도 못내준다 산단계획 철회하라!’가 적힌 현수막을 천막 사이에 내걸고 그 앞에 일렬로 자리했다.

매서운 겨울 한파와 찬 바람을 막을 유일한 도구는 일회용 핫팩과 방석을 대신할 얇은 스티로폼이 전부였다. 그 자리에 앉아 꼬박 1시간 30분을 버텨냈다. 군청 공무원들이 오가며 말을 붙이기도 했지만 주민들은 김기형 반대대책위원장의 농성 종료 선언이 있을 때까지 앉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90분간의 농성 시간 동안 두세 차례나 방송차에 올라 산단 반대 이유를 역설한 김기형 반대대책위원장은 “산단 예정부지에 포함된 우리 마을 앞 들녘은 100% 절대농지다. 약 10만평의 우량농지가 포함돼 있다. 농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식량 생산수단이다. 전 세계적인 기후, 식량위기 시대에 21%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선 절대농지를 유지하고 확보해야 한다. 농지 위에 들어서는 산업단지는 절대 추진돼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11월 이후, 일상이 돼버린 듯 익숙하게 농성장을 정리한 주민들은 군청에서 10여km 떨어진 마을로 다시 돌아갔다. 마을 앞 너른 들녘엔 ‘산업단지백지화 결사저지투쟁!’, ‘마을공동체사수 산단결사저지!’가 적힌, 볏짚을 갈무리해 쌓아 놓은 ‘공룡알’(곤포사일리지)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로 하루를 시작한 김상만 노인회장은 들녘을 바라보며 “여기가 여간 들이 넓어? 농림부 장관부터 농지를 해제하면 안 됐어. 우리보다 앞서 (산단 개발을) 겪은 사람들이 ‘정말 억울하다. 절대 쫓겨나지 말라’고 당부하더라고. 동네 단출하고 앞뜰 넓고 뒷산 든든하고 모두 한 가족 같은 우리 마을 사람들을 그냥 이대로 살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편, 23만평 규모로 착공 예정인 ‘진천테크노폴리스산업단지’ 부지 중 약 10만평은 절대농지, 즉 농사 외 다른 업종이 불가능한 농업진흥지역이었지만 지난해 11월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업진흥지역 지정을 해제, 주민들의 바람을 등지고 산단 개발의 길을 터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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