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의 어느 여름 저녁, 목포항 부둣가 골목은 제주행 여객선을 놓친 피서객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낙담과 불평들이 쏟아졌지만, 멀리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여행객들 중 제주행을 포기하고 되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그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호객꾼들이 있었다.-자, 식사들 하세요! 숙박도 됩니다아! 우리 식당에 딸린 방에서 주무시고 내일 출발하세요!-이봐요, 아니 순서가 끝도 없이 밀렸는데 내일이라고 배를 탈 수 있겠어요?-앗다, 돈만 낫이 주면 내가 책임지고 가야호 태워줄 것잉께, 걱정 말고
피서 철에 사람들이 몰려서 제때 배를 못 타거나 혹은 태풍주의보가 빨리 해제되지 않아서 목포에 발인 묶인 경우 가장 곤란을 겪은 사람은, 모처럼 육지에 볼 일이 있어서 나온 제주도 사람들이었다.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려던 사람들이야 여의치 않으면 집으로 되돌아가면 그만이겠으나, 제주도 사람의 경우에는 기약 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배 뜰 날 만 기다리는 수밖에.잠깐 일보고 돌아가려고 왔다가 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아 꼼짝 못 하게 된 제주 사람들에게, 우선 급한 것은 체재경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전화가 됩니까, 송금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1970년대 들어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겠다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불어났지만 여객선의 수송능력은 한계가 있었던지라, 부두에 몰려나왔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표를 구하지 못한 채,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숙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제주행 여객의 적체를 부채질했던 이유가 또 있었다. 걸핏하면 발령되는 태풍주의보였다.-아, 아, 승객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태풍주의보가 내려서 오늘 제주행 여객선 못 뜹니다!출항 시각이 임박해서 갑자기 이런 방송이 흘러나오면, 대기하고 있던 승객들은 애꿎은 여객운송회사의 영업부 직원에게 매우 거칠게
1965년 8월 12일, 목포 앞바다에 진귀한 구경거리 하나가 등장했다. 사람들이 다투어 항구로 몰려나왔다. 상당수 시민들은 보다 좋은 자리에서 구경하려고 유달산 중턱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열흘 남짓 뒤에 제작된 (제431호)는 그 장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지난 8월 12일 목포와 제주도 사이를 하루에 왕복하는 여객선 가야호의 취항식이 전라남도 목포항에서 있었습니다. 교통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 가야호는 총 톤수 500톤으로 승객 442명과 200톤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연안 도서 간을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관광여행’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귀에 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민들 대부분의 당면과제가 굶주림과 헐벗음을 벗어나는 것이었으니, 누군가에게 구경삼아 어딜 간다고 얘기하면 단박에 “팔자 늘어졌네”라는 비아냥 섞인 대꾸가 건너오기 일쑤였다.오늘날 국내 관광여행지를 순위로 매길 때 부동의 윗자리를 차지하는 제주도 역시, 당시엔 관광지로의 개발이 거의 안 돼 있었다. 개발이 안 돼 있기로는, 제주로 향하는 해상교통의 관문이라 할 목포항 역시 마찬가지였다.“여기가 수심의 높낮이가 좀 커요. 6미터 가까이나 되거
토요일 오후, 서울 방화동의 한 가정집이 시끌벅적하다. 고희를 넘긴 그 집 가장의 생일 축하모임 때문이다.-아니, 박 서방 아직 도착 안 했어? 출발했다고 연락 온지가 한 시간 반이 넘었는데?-오늘 주말이라 길이 좀 많이 막히는 모양입니다.-아무리 길이 막혀도 그렇지 거기도 서울인데 이렇게 오래 걸린단 말이야?-형님도 참, 말이 같은 서울이지 거기는 북쪽 끝에 있는 노원구 상계동이고, 여기는 서쪽 끝에 있는 강서구 방화동 아닙니까.그때 마침 대문이 열린다. 그런데 현관을 들어선 사람은 상계동의 그 박 서방이 아니다.-어어? 제주도
“철부지 시절의 일이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여러모로 미안하고 죄스럽지요. 내가 그 어른들 나이가 되고 보니까, 그때 위아래도 몰라보고 천방지축 날뛰면서 부잡스럽게 굴었던 행동거지가 막 후회가 돼요.”소싯적에 닭서리를 워낙 심하게 했던 탓으로 그 시절에 닭을 도둑맞았던 여러 고향 어른들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강원도 화천 출신의 전만제 씨가 뒤늦게 쓰는 반성문이다. 그의 반성문에는 단지 남의 닭을 훔친 데 대한 죄송함만 담긴 것이 아니다. 무뢰배처럼(그의 표현) 마을 어른들에게 안하무인격으로 굴었던 패행(悖
남의 닭을 몰래 잡아다 먹는 닭 서리야말로 ‘서리의 하이라이트’라 할만 했다. 그러나 농작물 보다는 훨씬 더 귀하게 여기던 ‘가축’을 훔친다는 점에서, 농촌사회의 관행이나 풍습으로 가벼이 보아 넘기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있었다.참외 서리나 수박 서리는 들키더라도 그냥저냥 넘어갈 수가 있지만, 닭을 훔치다 발각되는 날엔 최소한 주인에게 시가(時價) 배상은 해 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돼지 서리’ ‘염소 서리’ ‘소 서리’라는 말은 없어도 ‘닭 서리’라는 말만은 매우 친근하게 들리는 걸 보면, 닭 한두 마리를 몰래 잡아먹는 정도는 심
이쯤 되면 ‘서리’를 경험하지 못 한 젊은 독자들의 경우, 부모나 조부모 세대가 들려주는 그 궁핍하던 시절의 치기어린 장난을, 아련한 옛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담 정도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그렇게만 받아들이기엔 조금쯤 멈칫거려지는…‘선을 넘는 녀석들’이 있었다.가을 밤, 제법 머리가 큰 여드름투성이의 사내 녀석들이 울타리를 타넘고 들어가서 참외서리를 시작한다. 그 때 원두막에 등불이 켜지고, 참외밭 주인이 손전등을 비추며 소리친다.-이놈들, 게 섰거라!이런 경우 서리를 하던 녀석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느라 여념이 없어야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소싯적의 서리에 얽힌 얘기를 할 때면, 가장 흔하게 들먹이는 것이 바로 참외 서리다. 그런데 밀 서리나 콩 서리 따위야 초등학생 나이의 어린 아이들도 즐겨하곤 했지만 한밤중에 작심하고 참외밭으로 서리 행차를 나가는 축은, 아무래도 제법 덩치가 굵은 청소년들이었다. 물론 그보다 어린 아이들이 형뻘 되는 사람들을 따라 나서기도 했지만.여름 달밤, 동네 고샅을 지나 풀벌레 우는 들길로 세 명의 청소년들이 나섰다. 네 명은 다소 번잡하고, 두 명은 좀 불안하다. 그래서 참외든 뭣이든 과일 서리 행차에는 세 명이 맞춤하다.
‘서리’는 행위 주체가 우선은 아이들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장난이 관용으로 용인될 수 있다. 또한 콩이나 밀이나 수숫대나 고구마 등의 밭작물인 경우 ‘설익은 풋것’을 먹을거리로 취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리라 부를 수 있다. 만일 가을철 추수기에 남의 밭에 들어가서 다 익은 옥수수나 밀이나 콩 등을 마구 채취해 온다면, 아무리 적은 양일지라도 그것은 남의 수확을 가로챈 셈이 되므로 ‘장난’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끄슬려 먹고 벗겨 먹고 하려면 역시 풋것이라야 부드럽고 맛나다.그렇다면 들판이 휑하니 비어버린 한
일반적으로 ‘서리’는 사내아이들이 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참외든 복숭아든 남의 것을 훔쳐 먹으려면 밤 시간에 끼리끼리 모여서 작당을 해야 하는데, 당시만 해도 부모들은 딸이 밤 마실 가는 것을 여간해서는 허락하지 않았다.하지만 경로당에 모인 농촌 출신의 할머니들이 소싯적을 회상할 때면, 어김없이 서리에 관한 추억을 빼놓지 않는다. 그들도 서리를 했다. 대신에 소녀들의 서리는 매우 소박했다.초여름 어느 날 빨래터에서 돌아오던 너덧 명의 소녀들이 뉘 집 밭 들머리의 풀밭에 앉았다.-뻐꾸기도 배고프다고 울어쌓고…우리 저 아래 춘식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