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서리⑦ 서리꾼? 아니 날강도!

  • 입력 2021.12.12 18:00
  • 수정 2021.12.13 16:3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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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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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시절의 일이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여러모로 미안하고 죄스럽지요. 내가 그 어른들 나이가 되고 보니까, 그때 위아래도 몰라보고 천방지축 날뛰면서 부잡스럽게 굴었던 행동거지가 막 후회가 돼요.”

소싯적에 닭서리를 워낙 심하게 했던 탓으로 그 시절에 닭을 도둑맞았던 여러 고향 어른들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강원도 화천 출신의 전만제 씨가 뒤늦게 쓰는 반성문이다. 그의 반성문에는 단지 남의 닭을 훔친 데 대한 죄송함만 담긴 것이 아니다. 무뢰배처럼(그의 표현) 마을 어른들에게 안하무인격으로 굴었던 패행(悖行)에 대한 참회의 마음이 더 진한 글자로 쓰여 있다.

전만제와 그의 동무들이 열여덟 혹은 열아홉 살쯤 됐을 무렵의 어느 가을 밤, 네 명의 사내들이 닭 서리에 나선다. 그런데 그들 중 두 녀석은 손에 몽둥이를 들었다.

“바로 다음 날 공설운동장에서 각 마을 대항 운동시합이 열릴 예정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녁에 몸보신을 해야 한다, 뭐 그런 핑계를 대고 나선 것이지요. 처음에 목표로 삼은 집은 동네 뒷산 중턱에 살고 있는 조 씨네였어요. 외딴집인데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집이었고, 무엇보다 닭을 이십여 마리나 키우고 있다고 소문이 났었거든요.”

그런데 도착해보니 닭장은 텅 비었고, 사납다고 소문이 났던 개도 보이지 않았다. 낭패였다.

-닭을 다 처분하고, 개까지 데리고서 추석 쇠러 간 모양이야. 오늘 닭 서리 포기할까?

-안 되지. 체육대회가 내일인데 명색 마을 대표선수들이 원기 회복을 안 할 수가 있나.

-그럼 저 쪽 비탈에 있는 박 영감네 집 어때?

-에이, 그 집은 달랑 영감 할멈만 사는 불쌍한 집인데… 그리고 닭도 너덧 마리밖에 없잖아.

-그래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 집 가서 딱 두 마리만 붙들어 오자.

그렇게 해서 평소에 서리꾼이 지켜야 할 규칙, 즉 노인네만 사는 집이나 적은 수의 닭을 키우는 집은 피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무시하고, 박 영감네 집으로 쳐들어갔으렷다. 그런데 사립을 들어서자마자 잠귀 밝은 박 영감이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소리쳤다.

-거기 밖에 누구야!

이때 주의할 것은, 주인이 눈치 채지 못 하도록 목소리를 철저히 변조해야 한다는 점이다.

-영감님! 닭 두 마리만 갖고 갈 테니까 밖으로 나올 생각 아예 마시고 잠자코 안에 계세요! 야, 거기 문 못 열게 몸으로 꽉 밀어!

-이놈들! 야, 이 도둑놈들아! 문짝 밀지 말고 저리 비키지 못 해!

-영감! 자꾸 이러면 다치는 수가 있어! 이 몽둥이 소리 안 들려!

이쯤 되면 서리가 아니라 아예 강도짓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아들이 비단 그 동네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홍천의 과수원집 딸이었던 심영춘 할머니도 그런 일을 겪었다.

“인기척을 듣고 우리 어머니가 깨어나셨다는데, 밖에서 닭장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래요. 무서워서 나가지는 못 하고 불을 켜고서는 일부러 둘째야, 일어나서 소변봐야지, 괜히 그렇게 큰 소리만 냈지 아버지를 깨우지는 못 했대요. 자칫 밖으로 나갔다가 봉변 당할까봐서. 아침에 문을 열었더니 툇마루에 커다란 몽둥이를 걸쳐놨더라고요.”

전만제 일당은 닭을 훔쳐갖고 나온 뒤에 닭털을 한 움큼 뽑아서는, 윗마을로 가는 길목에다 드문드문 뿌려놓았다. 며칠 뒤에 박 영감이 전만제의 집에 놀러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웃마을 젊은 것들, 그 중에서도 이수근이 둘째아들 고놈, 아주 못된 놈이야. 애들 몰고 댕기면서 남의 닭이나 훔쳐다 먹고 말이야, 너는 혹시라도 그놈들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거라.

“아, 체육대회 어떻게 됐느냐고요? 닭 잡아먹느라 밤을 꼬박 샜으니… 꼴등 했지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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