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목포-제주 바닷길⑥ 아십니까, 무전여행

  • 입력 2022.01.23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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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0년대 초의 어느 여름 저녁, 목포항 부둣가 골목은 제주행 여객선을 놓친 피서객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낙담과 불평들이 쏟아졌지만, 멀리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여행객들 중 제주행을 포기하고 되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그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호객꾼들이 있었다.

-자, 식사들 하세요! 숙박도 됩니다아! 우리 식당에 딸린 방에서 주무시고 내일 출발하세요!

-이봐요, 아니 순서가 끝도 없이 밀렸는데 내일이라고 배를 탈 수 있겠어요?

-앗다, 돈만 낫이 주면 내가 책임지고 가야호 태워줄 것잉께, 걱정 말고 따라 오세요!

-정말 내일 제주 가는 배 타게 해줄 수 있어요? 돈을 얼마나 내면 되는데?

배를 놓친 피서객과 호객꾼 사이에 이런 거래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식당이나 여인숙의 호객꾼들은 정식 배 삯의 열 배도 넘는 돈을 받고 손님들을 편법으로 태웠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제주 여행 포기하고 되돌아간다 해도 숙박비며 기찻삯이며 돈 들기는 마찬가지거든요. 제주에서 볼일 때문에 건너왔다가 발이 묶인 사람들도 목포에서 이삼일 묵으면 경비 감당이 안 돼요. 뱃삯이 1,380원 할 때 15,000원씩이나 받고 뒷구멍으로 태웠어요.”

부두노동자 출신 김삼수 씨의 증언이다.

당시 가야호는 낮 12시 반에 목포항에서 닻을 올렸다. 그런데 공식 개찰을 하기 훨씬 전에 여객선에 미리 올라서 화물 창고나 화장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식당이나 여인숙의 호객꾼들에게 뒷돈을 주고 포섭되었던 사람들이다. 물론 호객꾼들이, 그들에게서 받은 뒷돈 중 일부를 술값이나 담뱃값 명목으로 선원들에게 쥐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원들이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은밀히 주의사항을 전달한다.

-조금 있으면 항만청 직원들이 조사 나올 것잉께, 기침 소리도 내서는 안 돼요. 먼지도 날리고 냄새도 조깐 나긴 할 것인디, 할 수 있소. 꿈에 그리던 제주도 구경 갈라면 꾹 참어야제.

개찰을 시작하기 전에 항만청 관리들이 배에 올라가서 사전조사를 하게 돼 있었는데, 선원들이 화물 창고나 화장실에 숨겨놓은 사람들을 적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도 대충 그렇게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여객이 승선하기 전에 신분증을 확인하거나 인적 사항을 별도로 기재하지 않고 탔기 때문에, 승객들이 배에 오르기 시작하면 그 때는 숨어 있을 필요 없이 선실로 나와도 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볼 만한 곳이 제주도였다.

육칠십년 대에 제주행 가야호를 이용했던 여객 중에는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이, 젊은이, 배를 탈 것이여, 안 탈 것이여?

-아, 제주도를 가긴 가야겠는데…죄송하지만 돈이 없습니다. 그냥 좀 태워주면 안 될까요?

멀쩡하게 생긴 젊은이가 제주행 객선을 공짜로 태워 달라 한다. 요즘 같으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아 욕바가지 뒤집어쓰고 당장 내쫓길 터인데…그땐 달랐다. 그가 대학생이라면.

-저…무전여행을 하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좀 태워 주실 수 없겠어요?

-대학생인지 아닌지도 몰르겄고, 또 돈이 참말로 없는지 감춰놓고 없다고 거짓말하는지도 몰르겄응께, 쩌그 역전파출소에 가서 확인서를 한 장 받어 갖고 오드라고.

“파출소에서 진짜 대학생이 맞다, 또 돈이 한 푼도 없는 무전여행자다, 하는 것을 증명하는 확인서를 써줘요. 그럼 뭐 회사에서는 내치지 못 하고 그냥 태워줬지요. 제주도에 가서는 귤 따는 품을 팔든, 감자 캐는 일을 하든 알아서 먹고 자고 지내다가 또 공짜로 배를 타고….”

만일 그 또래의 공장 노동자가 무전여행 중이라고 했으면 배를 공짜로 태워주었겠느냐고 물었더니 김삼수 씨는 단박에 “택도 없는 소리”라고 잘라 말한다. 대학생은 그런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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