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서리③ 멀고 험했던 ‘먼 옛날의 과수원 길’

  • 입력 2021.11.14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서리’는 행위 주체가 우선은 아이들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장난이 관용으로 용인될 수 있다. 또한 콩이나 밀이나 수숫대나 고구마 등의 밭작물인 경우 ‘설익은 풋것’을 먹을거리로 취했을 때에야 비로소 서리라 부를 수 있다. 만일 가을철 추수기에 남의 밭에 들어가서 다 익은 옥수수나 밀이나 콩 등을 마구 채취해 온다면, 아무리 적은 양일지라도 그것은 남의 수확을 가로챈 셈이 되므로 ‘장난’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끄슬려 먹고 벗겨 먹고 하려면 역시 풋것이라야 부드럽고 맛나다.

그렇다면 들판이 휑하니 비어버린 한겨울엔 어디 가서 서리를 하나?

어스름 저녁이 되자 고만고만한 소녀들이 제가끔 수틀을 챙겨갖고 누군가의 방으로 마실 나와서는, 울긋불긋 꽃수를 놓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밤이 제법 깊어지니 뱃속이 궁금하다.

-우리 출출한데 무 서리 하러 갈까?

-좋아, 가자. 길님이네 집 무 구덩이를 내가 알거든.

세 명의 여전사가 나선다, 아무개네 남새밭 귀퉁이에 만들어놓은 무 구덩이가 목표다.

“겨울에 밤은 너무 길고 배는 고프니까 누구네 집 무 서리하러 가자, 그러면 세숫대야를 챙겨 들고 나서는 거지요. 무가 다 같은 것 같아도 안 그래요. 어느 집 무가 더 달고 맛있다는 걸 우린 다 알거든요. 구덩이 쪽으로 살살 가서 볏짚을 들어내고는 큰놈 서너 개를 세숫대야에 담아 갖고 와요. 둘러앉아서 껍질 벗겨 먹으면…사과나 배는 비할 바 아니게 맛나요.”

강원도 홍천이 고향인 심영춘 할머니가 연신 입맛을 다시면서 들려준 얘기다.

무 서리가 소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교사인(2002년 당시) 이청길 씨가 소년시절에 했다는 무 서리는 좀 더 전문적이다.

“그 집 무 구덩이는 유난히 깊었어요. 무가 거기 있다는 건 아는데 깜깜한 밤이니까 꺼내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도구를 준비했지요. 지게 작대기에다 쇠꼬챙이를 묶어 갖고 가서 쿡쿡 찌르니까 무가 박혀 올라와요, 겨울철에 먹는 무는 특별히 더 달고 맛있었는데….”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서리의 진수는 과일 서리다. 일제강점기에 황해도 연백에서 소년기를 보냈던 고경식 할아버지의 복숭아 서리 얘기부터 들어보자,

“우리 동네에 복숭아 농장이 있었는데 그 과수원 주인은 ‘민다’라는 일본인이었어요. 그래서 중학생 때 우리가 그 과수원에 복숭아 서리하러 갈 때면 ‘독립운동 하러 간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서리를 하러 자주 드나드니까 일본인 쥔장이, 우리가 단골로 출입하는 ‘개구멍’ 안쪽에다 구덩이를 파고는 거기다 인분을 채워놨어요. 똥통을 만들어놓은 거지요, 허허.”

그렇다고 서리를 포기하면 중학생이 아니다. 어느 여름 밤, 한 친구의 자취방에서 작당을 끝낸 소년 삼총사가 비장한 각오를 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철조망을 끼어 들어가서 앞으로 곧장 걸어가면 절대 안 돼. 거기 똥통이 있거든. 그러니까 통과하자마자 옆으로 비켜서 가야 돼. 알았지? 경식이 너는 울타리 밖에서 망보고.

그런데 막 복숭아 서리를 시작할 무렵에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다. 멀리 주인집에서 송아지만한 개가 끄르렁 컹컹, 무서운 소리를 내며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빨리 빠져나와!

한 녀석은 후다닥 울타리를 빠져나왔으나 나머지 한 녀석이 허둥대다가 그만 인분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한참 동안 첨벙대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맹견에게 물리기 직전에 구덩이를 탈출하여 울타리를 빠져나왔다.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 길, 때마침 달이 떠올랐는데, 아랫도리에 오물범벅을 한 녀석이 두 친구를 바라보며 씨익 웃더란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더란다.

-아, 역시 독립운동의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야.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