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서리⑤ 선을 넘는 녀석들

  • 입력 2021.11.28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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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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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서리’를 경험하지 못 한 젊은 독자들의 경우, 부모나 조부모 세대가 들려주는 그 궁핍하던 시절의 치기어린 장난을, 아련한 옛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담 정도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온전히 그렇게만 받아들이기엔 조금쯤 멈칫거려지는…‘선을 넘는 녀석들’이 있었다.

가을 밤, 제법 머리가 큰 여드름투성이의 사내 녀석들이 울타리를 타넘고 들어가서 참외서리를 시작한다. 그 때 원두막에 등불이 켜지고, 참외밭 주인이 손전등을 비추며 소리친다.

-이놈들, 게 섰거라!

이런 경우 서리를 하던 녀석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느라 여념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그 야간작전의 전리품을 아직 챙기지 못 한 사내들은 일순 당황하는 듯하더니, 준비해온 작대기를 치켜들고 되레 큰소리를 친다.

-꼼짝 하지 마! 여기 몽둥이 안 보여? 원두막에서 내려오면 가만 안 둘 거야!

-뭐야? 저, 저런 도둑놈들! 야, 이 나쁜 놈들아, 빨리 나가지 못해!

다급해진 사내들은 서둘러 참외밭 이랑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데, 원두막의 주인 영감은 제자리에 자박거리면서 고함만 질러댄다. 이쯤 되면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한자성어가 딱 맞아떨어지는 형국이다. 그 참외서리 현장에 동네 형들을 따라나섰던, 인천 학익동 출신 이명기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형들을 따라나섰다가 저도 놀랐어요. 어쩐지 지게작대기를 미리 갖고 가더라고요. 말이나 곱게 하는 줄 아세요? 이놈의 영감태기 내려오기만 하면…어쩌고저쩌고…. 그 형들이 중3 두 명에 고1 한 명이었는데 그쯤 되면 덩치도 크잖아요. 그러니까 원두막 할아버지는 봉변 당할까봐 내려오지는 못 하고 고함만 질러대고….”

하지만 과수원 주인이 서리꾼들에게 실제로 얻어맞아서 흉한 꼴을 당했다는 얘기는 전해 진 바 없다. 어차피 서리를 하러 간 사내들도 겁이 나서 그렇게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원두막을 지키던 나이든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그것은 간단한 사태가 아니었다. 왕년에 강원도 홍천의 과수원집 딸이었던 심영춘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한다.

“아버지가 저녁 진지 드시려고 집으로 오시는 바람에 어머니 혼자 원두막에 있었나 봐요. 어둑어둑한 밤이었는데, 느닷없이 사내 녀석들이 참외밭으로 들이닥치더니 원두막 아래쪽에다 돌을 막 던지면서 꼼짝하면 죽여 버린다고…어머니는 그 날 밤에 집에 와서는 한참 동안 벌벌 떠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날 아버지가 급히 수소문해서 큰 개 두 마리를 사왔었지요.”

장유유서의 질서가 보다 강고하던 그 시절의 농촌사회에서, 윗사람 아랫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를 아예 무시한 채, 나이든 주인에게 마구잡이로 엄포를 놓곤 했으니…그야말로 선을 넘는 탈선(脫線) 행위였다.

어지간하면 서리하는 아이들을 발각하더라도, 오히려 참외나 복숭아 하나 둘씩을 손에 들려서 돌려보내곤 하던 주인들도 이건 아니다 싶으면 다음 날 학교로 달려갔다.

-제가 교장입니다만,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이 학교 댕기는 김팔복이라는 놈하고 송순갑이라는 놈이 어지께 밤에 우리 수박밭에 와갖고 수박농사를 다 망쳐놨어요! 도대체 학교에서 선상들이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것이여!

이런 상황이야말로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경우다. 이어지는 이명기 씨의 얘기.

“그땐 선생님을 제일 무서워했지요. 과수원 주인이 학교로 찾아오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벌을 받고, 화장실 청소는 도맡아 했어요. 게다가 저놈은 남의 집 참외, 수박 훔치다 들킨 도둑놈이라는 딱지가 붙게 되면 고개 들고 다닐 수가 없지요.”

그래서 1947년생 전만재 씨와 그의 동무들이 궁리 끝에 개척해낸 돌파구는 이러했다.-우리 동네에서 서리하다 들키면 아부지한테 혼나지, 자칫하면 학교에서도 벌 받지…그러니까 다음번엔 아예 얼굴을 모르는 아랫마을로 진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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