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목포-제주 바닷길③ 목포 앞바다에 가야호가 떴다!

  • 입력 2022.01.01 00: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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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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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8월 12일, 목포 앞바다에 진귀한 구경거리 하나가 등장했다. 사람들이 다투어 항구로 몰려나왔다. 상당수 시민들은 보다 좋은 자리에서 구경하려고 유달산 중턱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열흘 남짓 뒤에 제작된 <대한 늬우스>(제431호)는 그 장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지난 8월 12일 목포와 제주도 사이를 하루에 왕복하는 여객선 가야호의 취항식이 전라남도 목포항에서 있었습니다. 교통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 가야호는 총 톤수 500톤으로 승객 442명과 200톤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연안 도서 간을 왕래하는 여객선으로는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철선으로서….

이미 이태 전인 1963년부터 목포-제주 간을 격일로 운항했던 300톤급 목선 덕남호(뒤에 경주호로 개칭) 등이 있긴 했으나 가야호는 규모나 시설, 그리고 속도 면에서 그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박준영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 전에 다니던 덕남호나 신광호는 12시간이 꼬박 걸렸는데 가야호는 7시간 반이면 제주항에 도착해요. 맨 꼭대기에 조타실과 통신실이 있고, 그 밑에는 2등 객실하고 선원식당이 있고, 그 아래층에 3등 객실과 1등 침대칸이 있고…처음 타본 사람은 두 눈이 휘둥그레 해질 정도예요. 풍랑이 거센 날 항구로 들어오는 모습을 유달산에서 바라보면요, 다른 배들은 물살 때문에 옆으로 자꾸 밀리는데, 가야호는 제 아무리 센 물살도 까딱없이 헤치고 들어와요.”

그 배는 객실도 1‧2‧3등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앞부분에 화물을 옮겨 실을 수 있는 기중기를 별도로 갖추고 있었다. 가야호의 사진이 초등학생들의 사회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얼마나 획기적인 해상교통 수단이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바로 이 가야호가 등장하면서, 목포-제주 간의 바닷길 여행도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자, 목포항은 제주도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로 매일이다시피 북새통을 이뤘다. 이 무렵에는 제주도가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고, 육지 사람들도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절대가난으로부터는 조금쯤 벗어난 시기였다. 그렇지만 서민들의 경우 항공기를 타고 제주도에 간다는 것은 엄두를 내기가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다.

어쨌든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주도에 가봤다’는 것이 자랑거리로 통했기 때문에 방학이나 휴일, 또는 여름 휴가철이면 목포항은 여행객들로 극심한 혼잡을 빚었다.

-아, 밀지 말어! 왜 자꾸 끼어들고 이래!

-내 짐 보따리 좀 밟지 말아요! 아침부터 줄 서 있느라 부아가 치밀어 죽겠구먼.

-나는 이틀째 부두에 나왔다가 배 못 타고 여관 밥을 다섯 끼나 먹은 사람이야!

사람들이 선표를 구입하기 위해 밀고 밀치는 등 아우성을 치고 있을 때, 관리자가 나타나서 호루라기를 분다.

-자, 앞에서부터 한 줄씩 끊어서 매표창구로 가게 할 것잉께, 줄을 똑 바로 서 보씨요이. 어이, 거그 대나무 장대 일로 갖고 와 봐.

“여객을 관리하는 직원 두 사람이 장대를 양쪽에서 나눠 잡고는 한 줄씩 딱딱 끊어서 앞으로 내보내요. 앞줄에 섰던 사람들이 표를 사고 나면 또 한 줄 끊어서 표를 사게 하고…. 그 날 표 못 산 사람은 별 수 없이 시내로 돌아가서 여인숙 신세를 져야지요 뭐.”

그러다 보니 제주로 신혼여행을 가려고 목포에 내려왔던 남녀가, 하는 수 없이 인근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첫날밤을 치르기도 했다. 그 시절 추석이나 설 명절 대목에 완행열차를 타려고 서울역이나 용산역 광장에 빽빽이 모여들어 밀고 밀리고 하던 사람들, 딱 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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