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서리⑥ 닭 서리-겨울밤이 너무 길어서

  • 입력 2021.12.05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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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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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닭을 몰래 잡아다 먹는 닭 서리야말로 ‘서리의 하이라이트’라 할만 했다. 그러나 농작물 보다는 훨씬 더 귀하게 여기던 ‘가축’을 훔친다는 점에서, 농촌사회의 관행이나 풍습으로 가벼이 보아 넘기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있었다.

참외 서리나 수박 서리는 들키더라도 그냥저냥 넘어갈 수가 있지만, 닭을 훔치다 발각되는 날엔 최소한 주인에게 시가(時價) 배상은 해 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돼지 서리’ ‘염소 서리’ ‘소 서리’라는 말은 없어도 ‘닭 서리’라는 말만은 매우 친근하게 들리는 걸 보면, 닭 한두 마리를 몰래 잡아먹는 정도는 심각한 절도행위로 보지 않고, 농촌 젊은이들의 ‘그럴 수 있는 일탈’ 쯤으로 포용을 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겨울 밤 동네 어느 집 골방, 참외 서리꾼들보다는 나이가 조금쯤 윗길인 사내들이 담요뙈기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화투를 친다. 벌써 여러 판째다.

-옳지, 팔광도 내가 먹었고…오, 이거 봐라, 홍단이다! 하하, 난 일등이니까 돈 안내도 되지?

-알았어. 자, 나머진 돈들 내. 그건 그렇고, 국수 사러 간 녀석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야?

-그런데 무쇠도 소화시킬 나이에, 그것도 긴긴 겨울밤을 기껏 국수 추렴이나 하고 있자니 처량하지 않아? 우리…닭 서리 하러 갈까?

한 청년이 목소리를 뚝 자지러뜨리며 속삭이듯 내뱉은 ‘닭 서리’라는 말에, 나머지 사내들의 눈이 반짝 빛난다. 입맛부터 다신 사내들은 나름의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누구네 집을 목표로 침투작전을 전개할 것인지를 의논한다.

-우물가 최 영감네 집 닭장이 허술한 것 같던데….

-에이, 그 집은 안 돼. 닭도 몇 마리 안 되고, 형편도 어려운데.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곤란하고…그러다가 결국 내(川)건너 춘남이네 집 닭장을 ‘순찰’하기로 결정한다. 외아들인 춘남이를 군대에 보내고 나이든 부부만 집을 지키고 있어서 들킬 염려가 덜하다는 점도 고려한 결정이었다.

어미닭 두 마리를 훔치는 데에 성공했다. 그 집은 여남은 마리나 되는 닭을 기르고 있었으므로, 날이 밝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밤손님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닭을 훔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바로 그 ‘뒷일’이었다고 전만재 씨는 회고한다.

“털 뽑고, 칼질해서 내장 긁어내고 하는 것쯤이야 시골에서 노상 하는 일이니까 어려울 것이 없지요. 문제는 그런 작업을 어디서 하느냐는 거지요. 생닭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씻어서 솥에다 넣고 아궁이에 불을 때서 삶고 해야 하는데…친구네 집 안방에 딸린 부엌에 들어가서 식구들 몰래 그 작업을 할 수 있나요? 더구나 사내 녀석들이? 어림도 없지요. 친구 어머니한테 부탁을 한다고요? 아이고, 아들놈이 친구들하고 남의 닭 훔쳐다 먹는 것을 도와줄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특히 우리나라의 자연촌락들은 성씨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집성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남의 가축을 훔쳐다 먹는 행위를 눈감아 줄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닭 서리꾼들이 훔친 닭을 가지고 찾아가는 집이 따로 있었다. 비교적 외진 곳에 사는 타성바지의 집이었다. 아니 애당초 그 집 안주인으로부터 사전 양해를 받고나서야 서리에 나섰다.

“그런 경우 집주인이 닭을 삶아서 상을 차려주지요. 물론 서리꾼들은 집주인한테, 비밀 아지트를 제공하고 요리를 해준 대가를 별도로 지불을 해요. 그런데 만약에 닭 서리한 것이 들통이 나서 아무개네 집에서 삶아 먹었다더라, 하는 것이 발각되면 그 집주인은 서리꾼들의 부모들한테 심하게 야단을 듣지요. 우리 동네에서는 청년들이 잡아온 닭을 두어 차례 삶아줬다가, 아예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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