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서리④ 서리의 정석, 참외 서리

  • 입력 2021.11.2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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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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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사람들이 소싯적의 서리에 얽힌 얘기를 할 때면, 가장 흔하게 들먹이는 것이 바로 참외 서리다. 그런데 밀 서리나 콩 서리 따위야 초등학생 나이의 어린 아이들도 즐겨하곤 했지만 한밤중에 작심하고 참외밭으로 서리 행차를 나가는 축은, 아무래도 제법 덩치가 굵은 청소년들이었다. 물론 그보다 어린 아이들이 형뻘 되는 사람들을 따라 나서기도 했지만.

여름 달밤, 동네 고샅을 지나 풀벌레 우는 들길로 세 명의 청소년들이 나섰다. 네 명은 다소 번잡하고, 두 명은 좀 불안하다. 그래서 참외든 뭣이든 과일 서리 행차에는 세 명이 맞춤하다.

-재석이네 참외 잘 익었을까? 지난번처럼 고생고생 해서 따왔다가 안 익었으면 어떡하지?

-그건 걱정 마. 내가 사전에 다 알아봤는데, 내일 모레가 재석이네 참외 따는 날이래.

기왕에 서리를 할 양이면 달고 맛있는 참외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 정보가 필요했는데, 뒷날 고등학교 윤리교사가 된 이청길(1953년생) 씨는 중학생 시절 그 방면에 도가 텄었다고 자랑한다.

“만일 누구네 집에서 하루 이틀 전에 참외를 따다가 장에 내다 팔았다는 얘기가 들리면 그 밭에는 가면 안 돼요. 안 익은 놈만 남아 있거든. 우리끼리 소식통을 종합하면 누구네 밭은 삼사일 만에 딴다더라, 누구네 밭은 일주일 만에 딴다더라, 하는 정보가 훤해요. 재석이네가 내일 참외를 땄다가 모레 장날에 내다 판다더라, 그런 정보가 입수되면 오늘 밤에 바로 그 밭으로 가는 거지요.”

일단 행선지가 정해지면 다음으론 동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참외밭까지 도착하는 것이 일차 목표다. 보통은 자정이 가까운 밤중에 서리에 나서는데, 이동하는 중에 동네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날은 서리를 포기해야 한다. 아무개 아무개가 어젯밤에 누구네 밭쪽으로 가더라, 이런 소문이 나는 날에는 그들의 서리행각이 꼬리가 밟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원두막에 불빛 보이는데 괜찮을까?

-안 보이게 엎드려서 조심조심 들어가자구.

-너 빨리 바지 안 벗고 뭣 해? 네가 벗기로 했잖아.

셋 중에서, 반바지 위에다 긴 바지를 미리 겹쳐 입고 온 녀석이 바지를 벗더니, 능숙하게 양쪽 가랑이를 묶는다, 서리한 참외를 담아갈 훌륭한 자루가 됐다.

이제 본격적인 참외서리에 들어가는데, 무엇보다 원두막에서 망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주인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 하늘에서 비라도 뿌려주면 서리꾼들의 ‘야간작업’ 조건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다. 비가 오면 대개의 주인들은 원두막의 거적뙈기 차양을 아래로 내려버리고 안심하고 잠을 청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참외의 품질이다.

“잘 안 보이니까, 만져봐서 일단 큰놈으로 따야 익은 놈일 가능성이 커요. ‘참외 좀 볼 줄 아는’ 서리꾼은 냄새만 맡고서도 금세 알아요. 잘 익은 참외는 단내가 나거든요. 촉감으로도 알 수 있지요. 표면이 꺼끌꺼끌한 놈은 따면 안 돼요. 만질만질한 놈이 잘 익은 놈이지요.”

참외 서리꾼들에게 가장 안 좋은 상황은 물론 주인에게 발각되는 경우다.

-이놈들, 거기 누구야!

-야, 들켰어. 빨리 도망치자!

원두막을 내려온 주인이 소리를 지르면서 쫓아오고(발걸음보다 고함소리만 앞서지만), 서리꾼들이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놓는다. 대개의 경우 원두막을 지키는 쥔장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어서 붙잡히는 일은 흔치 않다. 하지만 원두막 가까운 곳에서 서리를 하다가 도망칠 엄두를 못 내고 코앞에서 들켜버리면, 아이들은 참외밭 주인으로부터 한바탕 훈계를 듣는 것은 물론이고, 다음 날이면 그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님으로부터도 부지깽이 욱대김을 당할 각오를 해야 했다. 물론 그런 경우라도 주인은 철부지 서리꾼들의 손에 참외 하나씩은 들려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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