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목포-제주 바닷길⑤ ‘엄마 없는 하늘아래’를 장기 상영했던 사연

  • 입력 2022.01.16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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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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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철에 사람들이 몰려서 제때 배를 못 타거나 혹은 태풍주의보가 빨리 해제되지 않아서 목포에 발인 묶인 경우 가장 곤란을 겪은 사람은, 모처럼 육지에 볼 일이 있어서 나온 제주도 사람들이었다.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려던 사람들이야 여의치 않으면 집으로 되돌아가면 그만이겠으나, 제주도 사람의 경우에는 기약 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배 뜰 날 만 기다리는 수밖에.

잠깐 일보고 돌아가려고 왔다가 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아 꼼짝 못 하게 된 제주 사람들에게, 우선 급한 것은 체재경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전화가 됩니까, 송금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별 수 있어요? 전당포에 찾아가서 시계도 맡기고 반지도 맡기고 그랬지요. 그래서 항구 인근에 전당포가 즐비했어요. 다른 지역의 전당포보다 유리했던 것은, 육지나들이를 하려면 큰맘을 먹어야 하니까, 저당물을 포기하고 안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지요. 기한 지나면 처분해도 되니까 수지맞는 장사지요.”

당시 부두노동자였던 김삼수 씨의 증언이다.

태풍주의보로 여객선이 여러 날 항구에 묶여 있는 경우 곤란을 겪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목포 시내의 극장 주인들이었다. 서울에서 개봉된 영화의 필름은 지방의 대도시를 거쳐서 목포와 같은 중소도시까지 순차적으로 내려오게 돼 있었는데, 목포의 경우에는 제주도에서 상영하고 난 다음에 여객선으로 그 필름을 받게 돼 있었다. 극장 주인들은 애가 타서 하루에도 몇 번씩 터미널의 운송회사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아니, 가야호 선장님이 배를 타고 있어야제 사무실에서 담배만 피고 있으면 어짤 것이여?

-허허허. 아, 내가 타기 싫어서 안 타겄능가? 태풍주의보 내렸다고 관청에서 못 가게 항께 나도 갑갑해 죽겄구먼. 그래, 목포극장 영사기는 잘 돌아가는가?

-제기랄, 제주도에서 필름이 와야 바꿔 돌릴 것 아녀. 예고편 포스터를 며칠 전부터 좍 붙여놨는디…에이, 참, 속상해 죽겄네.

-지금 하고 있는 영화 며칠만 더 돌리지 뭐.

-아, 시방 ‘엄마 없는 하늘 아래’라는 영화를 20일째 돌리고 있당께. 인자 목포 시민들이 그 영화 다 봐부러서, 당췌 구경하러 온 손님이 있어야 말이제.

-엄마가 어디로 도망가부렀는가? 태풍주의보 해제 될 때까지, 그 애기 보고 즈그 엄니 조깐 더 찾어댕게 보라고 그라소, 허허허.

물론 여객선이 여러 날 발이 묶여 있는 경우, 목포 쪽 사람들보다는 제주도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 하고 있는 육지 사람들의 고충이 훨씬 더 심했다. 그런 경우 제주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다음 기회에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목포에서 생활필수품이 들어가지 못해서 생기는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제주에서 쌀 생산이 안 된단 말예요. 얼핏 기억하기에 70년대 초만 해도 평균적으로 하루에 80킬로그램짜리 쌀가마가 천오백 개에서 이천 개씩 바다를 건너갔어요. 이삼일씩 배가 못 뜨다가 드디어 출항을 하게 되면, 장사치들이 쌀가마를 서로 실으려고 한바탕 전쟁을 벌여요.”

요즘이야 화물을 컨테이너에 담아서 지게차로 운반을 하거나 크레인을 이용하여 선적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부두 노동자들이 쌀가마를 직접 짊어지고 운반을 했다. 그 때에는 무게와 상관없이 가마니 단위로 운임을 받았기 때문에, 쌀장수들은 어떻게든 가마니의 개수를 줄여서 운반비를 아끼려고, 볏가마를 절구 공이로 다져가면서 쌀을 쟁여 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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