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목포-제주 바닷길④ 태풍주의보, 회항(回航) 그리고 ‘사바사바’

  • 입력 2022.01.0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0년대 들어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겠다는 사람은 날이 갈수록 불어났지만 여객선의 수송능력은 한계가 있었던지라, 부두에 몰려나왔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표를 구하지 못한 채,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숙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제주행 여객의 적체를 부채질했던 이유가 또 있었다. 걸핏하면 발령되는 태풍주의보였다.

-아, 아, 승객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태풍주의보가 내려서 오늘 제주행 여객선 못 뜹니다!

출항 시각이 임박해서 갑자기 이런 방송이 흘러나오면, 대기하고 있던 승객들은 애꿎은 여객운송회사의 영업부 직원에게 매우 거칠게 불만을 쏟아놓았다.

-아니, 바다가 저렇게 잔잔한데 주의보는 뭔 놈의 주의보예요!

-어제는 멀쩡하게 출항을 했는데 오늘 갑자기 태풍주의보라니 이건 말도 안 돼!

금세 멱살이라도 잡아챌 듯이 따지고 들면 영업부 직원은 손가락으로 유달산 쪽을 가리킨다.

-저기 노적봉 옆 측후소 지붕에 빨간 깃발 펄럭거리는 것 안 보여요? 주의보를 우리가 내리는 것이 아니고, 중앙관상대 목포측후소에서 항만청에다 통보를 하면, 항만청에서 우리 회사에 출항금지 지시를 내린다니까요. 아, 제주도에 가고 싶은 마음이야 우리가 몇 배나 더 하지요. 배가 한 번 못 뜨면 손해가 얼만데.

그렇게 하루 운항을 못하게 되면 다음 날 제주행 여객이 배로 늘어나서 혼잡이 더 극심했다. 그나마도 여행객들이 배에 오르기 전에 태풍주의보가 발령되는 날은 그래도 혼란이 덜한 편이었다. 그런데 배가 제주도를 향해서 한 시간도 넘게 운항을 하다가 선수(船首)를 다시 목포항으로 돌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선내 스피커에서 긴급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아, 아, 저는 가야호 선장입니다! 항만청에서 무전연락이 왔는데, 태풍주의보가 발령됐으니 즉시 회항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목포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니….

당시 운송회사 영업부 직원이었던 박준영 씨는 이렇게 회고한다.

“가다가 회항을 하면 회사도 손해가 막대하지만 승객들도 얼마나 맥이 빠지겠어요. 천신만고 끝에 배에 올라탔다가 도중에 항구로 되돌아오면 언제 다시 떠날지 기약이 없는데…. 그래서 회사 간부들하고 항만청 공무원 사이에 사바사바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거지요, 하하하.”

‘사바사바’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운송회사 사무실의 전화벨이 울린다.

-예, 선박과장입니다. 항만청이오? 그런데 무슨 일로…뭐, 태풍주의보라고요? 아이고, 지금 가야호가 손님들 다 태우고 막 출항을 하려던 참인데…잠깐만요. 그러지 마시고, 제발 부탁 좀 합시다. 주의보 발령을 두 시간 뒤에 내려주면 안 되겠어요? 오늘 제주 갈 손님을 꽉 차게 태웠는데…아, 예, 고맙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출항한지 두 시간이 지난 뒤에 태풍주의보가 발령되는 경우에는 회항하지 않고 제주도로 바로 가게 했었기 때문에, 잇속을 챙기려는 선박회사 측과 항만청 관계자들이 짝짜꿍이가 되어서 그런 편법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엄두도 못 낼 위험천만한 위법행위지만.

물론 이런 사례는 제주행 여객이 주체 못 하게 넘쳐나는 피서철의 일이고, 한겨울에는 정반대로 손님이 너무 적어서 선박회사 관계자들을 고민스럽게 만들기도 했다는데, 그런 경우에는 또 이런 ‘사바사바’가 이뤄지기도 했다.

-아, 여기 가야호 여객부두인데요, 날씨가 굼틀굼틀한데, 오늘은 태풍주의보 없어요? 손님이 몇 명 안 돼서, 기름 값 손해보고 빈 배로 왔다 갔다 하게 생겼는데, 때맞춰 항만청에서 주의보를 좀 내려 주시면….

그렇게 해서, 멀쩡한 날씨에도 태풍주의보를 핑계로 배를 띄우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세상이 어수선했던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