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예지동 피마골목의 한 한옥집. 여남은 살 사내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책가방을 툇마루 한쪽에 밀쳐놓고는 부리나케 대문을 향한다.-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나가서 동무들하고 놀다 올게요.-언니, 어디로 놀러 가는데? 나도 같이 갈래!-어디는 어디야, 청계천이지. 야, 같이 갈 거면 빨리 따라와. 지금 애들이 거기서 군사놀이 하려고 편 짜놓고 기다린단 말이야!-알았어. 언니야, 같이 가자!1930년대 중반,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이성선이, 소학교에 다니는 형 이각선을 따라 청계천으로 놀러나가는 장면이다. 옛적 서울
서기 2002년 6월의 어느 토요일 저녁 일곱 시, 서울 청량리역.시내로 향하는 전철에 백발성성한 70대 중반의 한 할아버지가 올라탄다. 아직은 걸음걸이가 젊은이들 못지않게 정정하고도 가지런한 이성선 할아버지(1929년생)다. 그는 동대문구 전농동 네거리 근방에 있는, 전형적인 동네의원인 ‘서울의원’의 원장선생이다.“저녁운동 나가는 거예요. 매주 토요일이면 진료가 일찍 끝나니까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그리고 날씨가 아주 궂지 않으면, 저녁식사를 마치고나서 어김없이 여기서 전철을 타요. 전철 타는 게 운동이 아니라, 운동을 하려고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획기적인 품질의 연필이 등장했다. 수업 시작 전, 아이들이 한 곳으로 몰려들어서 시끄럽다.-얘들아, 이 연필 우리 큰 아빠가 사다 주신 건데, 냄새 한 번 맡아볼래?-어디? 와, 되게 좋은 냄새 나는데? 그리고…무슨 연필이 이렇게 가벼워?-그러니까 비싼 연필이지, 헤헤.-연필 냄새가 어떻다고? 어디, 나도 나도 한 번 맡아보자.향나무 연필이었다. 그 연필이 처음 나왔을 때, 향나무 연필 한 다스를 가진 아이는 뭇 아이들의 부러움을 독차지 했다. 나무의 질이 좋아서 부드럽게 깎일 뿐 아니라, 피나무 연필과는
-오빠, 숙제해야 되는데 연필심이 부러져버렸어. 이거 좀 깎아주라.-바보야, 넌 연필도 하나 못 깎냐? 이리 내봐. 그런데…뭘로 깎지? 마당에 나가서 낫 좀 갖고와봐. 아니면 부엌칼을 갖고 오든지.연필깎이용 면도칼이 나온 건 한참 뒤의 일이었기 때문에, 196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시골 아이들은 김칫국물이 묻은 식칼이나 풀 베는 낫을 가지고 뚜덕뚜덕 연필을 깎았다. 물론 그때에도 주머니칼을 휴대하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주머니칼이 인기였어요. 날을 끄집어내서 연필을 깎고 나서는, 칼날을 딱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그
초창기에는 강원도에서 피나무 원목을 실어다가 전주의 연필공장에서 제재를 하여 제품을 만들었는데, 그러다보니 운송의 어려움도 있고, 나무를 켜는 과정에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얼마 뒤에는 아예 강원도에서 연필 8자루를 만들 수 있는 크기로 1차 가공을 해서 가져다썼다. 산판에서 벌목한 재목을 인근의 제재소로 운반해서 거기서 가공을 한 다음, 한 다발씩 새끼줄로 묶어서 연필공장으로 운송해 오는 방식이었다.그런데 여름철에 장마가 지거나 겨울철에 폭설이라도 내리면 인부들이 산판에 나가서 피나무 베는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1950년대 말 혹은 60년대 초에 공장에서 만들어진 연필은 어떻게 공급되었고, 사람들은 또 어떤 방식으로 연필을 사서 썼는지를 살펴볼 차례다.초창기에는 케이스가 따로 없이 낱개로 팔거나, 혹은 열두 자루를 실로 묶어서 반출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연필공장 사무실로는 연필을 떼어다 파는 행상들이 부단히 드나들었다.-안녕하시오. 열흘 전에 왔던 장돌뱅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습니다, 허허허.-어서 오십시오. 지난번에 물건 가져가서는 재미를 좀 봤습니까?-어휴, 달리 할 짓이 없어 이 장사 하지, 연필 이거 백날 팔아봤자 입에 풀칠하기
흑연과 점토를 재료로 삼아서 연필에 들어갈 심을 만들었으니 이제는 그 심을, 가공해 놓은 나무에다 결합할 차례다. 요즘이야 성능 좋은 접착제가 다양하게 생산되지만 1950~60년대만 해도 사정이 매우 열악하였다. 여공들이 작업대에 죽 늘어앉아서 8개의 홈이 파인 나무판자 두 개에다 밀가루 풀을 각각 바르고서, 그 홈에다 심을 넣는다. 그런 다음 풀칠이 된 두 개의 나무판자를 맞붙여서 압력을 가하여 접착하였다. 그 다음에는?“그런 다음에는 건조실로 옮기지요. 거기서 또 24시간 불을 때서 건조시킵니다. 하루가 지난 뒤에 꺼내 가지고
“강원도에서 실어온 피나무를 연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거든요. 연필공장에 있는 제재소에서 아름드리 피나무 원목을 전기톱으로 여러 번 켜서, 최종적으로는 연필 굵기의 절반만한 두께로 판자를 만들어요. 그 판자 한 판이면 여덟 자루가 나오는 분량이에요. 그러니까 초창기에는 연필 절반 굵기의 얇은 판자가 나올 때까지 피나무를 켜고 또 켜고 한 거지요. 물론 얼마 뒤에는 자동 톱날을 한군데에 여러 개 설치해서, 나무를 한 번 주욱 밀어 넣기만 하면 바로 여덟 자루 크기의 판자가 제재되어 나오도록 발전을 했지만요.”“아, 그 다음의 염색과정
근대식 연필은 18세기에 프랑스의 ‘콩테’라는 사람이, 흑연과 진흙을 짓이겨서 만든 연필심을 고온에서 굽는 방식으로, 처음 실용화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연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후반이며, 국산 연필공장들이 문을 열었던 때는 1940년대 중후반이었다.연필 제조업체들의 연혁을 살펴보니, 해방직후인 1946년 10월에 ‘동아연필(주)’이 설립되었고, 1949년 5월에는 ‘문화연필(주)’이 창립된 것으로 나온다.2002년 8월에 내가 찾아간 곳은 전주시 팔복동에 위치한 문화연필 공장이었다,공장에 들어서자 저만치에서, 완
1960년대의 어느 월요일, 시골 국민학교 교실.담임선생은 교단 옆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대신에 반장이 앞으로 나가 교탁에 섰다. 반장아이는 칠판에다 서툰 분필 글씨로 ‘검소한 생활을 하자’라고 크게 써놓고는 돌아선다.-지금부터 학급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학교에서 정해준 금주의 주훈은 ‘검소한 생활을 하자’입니다. 그러면 이에 따른 실천사항을 정하겠습니다. 좋은 의견 있으면 발표해 주십시오.시키니까 하는 것이지, 그런 겉치레 회의를 재미있어할 아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교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얼굴엔 영양실조로 군데군데 버짐
목포항에서 여객을 태운 가야호가 뱃고동 소리를 두어 번 길게 울리고는 드디어 부두와 멀어진다. 하지만 조타실 지붕에 설치된 확성기로 ‘사아공의 배엣노래…’를 가물거리며 출항한 가야호가 제주도를 향해 직항한 것은 아니었다. 가야호의 항로는 먼저 진도의 ‘벽파’라는 곳에 한 번 접안을 하고, 다시 추자도에 기항을 한 뒤에 뱃머리를 제주항으로 향하도록 돼 있었다.그런데 1960년대에 목포에서 추자도까지 다니던 단골손님 중에는 유명인사가 있었다. 박치기 왕으로 이름난 프로레슬러 김일이었다. 박준영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김일 선수가 낚시를
1970년대 초의 어느 여름 저녁, 목포항 부둣가 골목은 제주행 여객선을 놓친 피서객들로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한숨 섞인 낙담과 불평들이 쏟아졌지만, 멀리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여행객들 중 제주행을 포기하고 되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그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호객꾼들이 있었다.-자, 식사들 하세요! 숙박도 됩니다아! 우리 식당에 딸린 방에서 주무시고 내일 출발하세요!-이봐요, 아니 순서가 끝도 없이 밀렸는데 내일이라고 배를 탈 수 있겠어요?-앗다, 돈만 낫이 주면 내가 책임지고 가야호 태워줄 것잉께, 걱정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