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청계천② 청계천 둔치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 입력 2022.04.24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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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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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예지동 피마골목의 한 한옥집. 여남은 살 사내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책가방을 툇마루 한쪽에 밀쳐놓고는 부리나케 대문을 향한다.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나가서 동무들하고 놀다 올게요.

-언니, 어디로 놀러 가는데? 나도 같이 갈래!

-어디는 어디야, 청계천이지. 야, 같이 갈 거면 빨리 따라와. 지금 애들이 거기서 군사놀이 하려고 편 짜놓고 기다린단 말이야!

-알았어. 언니야, 같이 가자!

1930년대 중반,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이성선이, 소학교에 다니는 형 이각선을 따라 청계천으로 놀러나가는 장면이다. 옛적 서울지방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 손위 남자 형제를 모두 ‘언니’라고 불렀다는 것이 이성선 할아버지의 얘기다. (하지만 혼란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는 언니 대신 형이라 칭하기로 한다.)

몇 십 미터를 내달려 개천가에 이른 형제는, 석축 아래 모래밭 둔치로 곧장 뛰어내리는 문제를 두고 잠시 실랑이를 벌인다.

-난 여기서 뛰어내릴 텐데, 너한텐 너무 높으니까 넌 저 쪽으로 빙 돌아서 와.

-아니야, 형, 나도 여기서 뛰어내릴 수 있어.

-너 그러다 다치면 엄마한테 나만 혼난단 말이야.

-걱정 말래두. 자, 뛸 테니까 잘 봐. 으이차!

“아마도 석축의 높이가 어른 한 길쯤, 2미터 이상 됐던 것 같아요. 물론 멀리 돌아가면 낮은 곳도 있지요. 바닥으로 내려가면 대부분 모래밭인데 듬성듬성 풀도 나있었고…. 개천 한 가운데로는 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1930년대의 청계천의 모습에 대한 이성선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콘크리트로 복개된 뒤의 청계로의 폭이 50여 미터쯤 되고 차도 양쪽으로 인도가 뻗어있었는데, 그 인도가 바로 복개 이전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석축 위의 천변 통행로였다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한가운데로, 전체 개울 폭의 3분의 1 가량의 너비로 물이 흘렀다. 물이 흐르지 않는 나머지는 모래밭이었는데, 군데군데 잡풀이 나 있기도 했다. 이성선 형제가 친구들과 놀이를 하려고 뛰어내린 석축 구조물은 역사가 만만치 않다. 여름철에 침수 피해가 갈수록 심해지자, 조선 영조 재위기에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하면서 양쪽에 석축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제가끔 막대기를 쥔 아이들이 동편과 서편으로 갈라서 ‘군사놀이’를 한다. ‘우리 집에 왜 왔니…’ 하는 놀이처럼, 대결을 하기 전에 양편이 먼저 합창으로 주거니 받거니 묻고 또 답한다.

어디서 왔니? / 동쪽에서 왔다. / 몇 천 명 왔니? / 삼천 명 왔다. / 무슨 옷 입었니? / 군사복을 입었다. / 무슨 모자 썼니? / 투구를 썼다. / 무슨 무기 들었니? / 칼을 차고 왔다. / 자, 그럼 싸우자! / 와아…

싸움이 벌어진다. 도중에 칼(나무 막대)을 부러뜨리거나 혹은 떨어뜨린 사람은 패자가 된다. 한바탕 놀이를 하다 땀이 나면, 아이들은 개천으로 달려 내려가 첨벙거렸다. 물론 안심하고 목욕을 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한 물은 아니었지만, 참붕어를 비롯한 물고기들이 잡힐 정도였으니, 적어도 악취를 풍기는 오염하천은 아니었다는 게 이성선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길게 가로질러 흐르다가 중랑천으로 빠져나가는 청계천은 그 길이가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뒷날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복개한 것은 하천의 기능만 상실하게 만든 게 아니라, 천변 아이들이 즐거이 뛰어놀던 광활한 놀이터 역시 침침한 어둠 속에 묻어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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