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연필⑤ “연필 사세요. 외상도 됩니다!”

  • 입력 2022.03.20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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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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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혹은 60년대 초에 공장에서 만들어진 연필은 어떻게 공급되었고, 사람들은 또 어떤 방식으로 연필을 사서 썼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초창기에는 케이스가 따로 없이 낱개로 팔거나, 혹은 열두 자루를 실로 묶어서 반출을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연필공장 사무실로는 연필을 떼어다 파는 행상들이 부단히 드나들었다.

-안녕하시오. 열흘 전에 왔던 장돌뱅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습니다, 허허허.

-어서 오십시오. 지난번에 물건 가져가서는 재미를 좀 봤습니까?

-어휴, 달리 할 짓이 없어 이 장사 하지, 연필 이거 백날 팔아봤자 입에 풀칠하기 힘들어요.

-에이, 그래도 김 씨는 수완이 좋아서 장사를 잘 한다던데…이번엔 물건 좀 많이 떼 갖고 가요. 상하는 물건도 아니고 못 팔면 뒀다 팔면 되지. 창고에 재고가 쌓여서 골치라니까.

-우선 물건부터 줘 봐요, 내일이 정읍 장날이라 거기부터 가봐야 하니까.

요즘처럼 문구점이 따로 있던 시절이 아니었고, 또한 국산 연필이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별반 알려지지도 않았던 터라, 연필공장에서는 만들어 놓은 제품을 어떻게 파느냐가 코앞에 닥친 문제였다. 그 땐 연필만 떼어다 파는 상인들이 따로 있어서, 그들이 5일 장터나 국민학교들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공장 창고에서 상인들한테 연필을 내줄 때에는 한 다스 단위로 꾸려놓은 꾸러미를 주는 게 아니라, 낱개를 수북이 쌓아놓은 무더기에서 대강 덜어서 상자에 담아 줘요. 값도 대충 어림해서 받았고요. 그러면 상인들은 그 연필상자나 보따리를 메고는 우선 오일장터로 가지요.”

장터에서 장사하는 모습이야 연필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약 사세요, 고무신 사세요, 양은냄비가 왔습니다…하는 것처럼 그렇게 팔았다.

-자, 연필이 왔습니다! 전주 팔복동에 자리 잡은 <문화연필> 공장에서 생산한 질 좋은 국산 연필이 왔습니다. 자, 다들 여기 보세요! 심이 얼마나 단단한지, 이렇게 깎은 연필을 나무 상자에다 이렇게 마구 찔러도 절대로 안 부러져요! 아니 이런…내가 너무 세게 찔렀나, 하하….

-여기 백 원어치만 주세요. 우리 집엔 학교댕기는 애들이 원체 많아놔서.

상인들은 장바닥에 자리를 펴고 흡사 알 성냥을 됫박으로 팔듯이, 연필을 무더기로 쌓아놓고서는 듬뿍듬뿍 집어주곤 했다. 사가는 사람들 역시 몇 자루 주세요, 가 아니라 50원어치 주세요, 100원어치 주세요,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국산 연필은 심이 잘 부러진다는 것이 소비자들의 인식이었으므로, 무엇보다 연필심이 단단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선전해야만 했다.

상인들이 돌아다니는 곳은 5일 장터만이 아니었다. 이 마을 저 고을에 있는 시골 국민학교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일단 교장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사정 얘기를 하고, 연필 선전을 좀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지요. 다른 물건이 아니고 학용품이어서 어지간하면 승낙을 했어요. 승낙을 한 정도가 아니라 운동장에 학생들을 모아주기도 했다니까요. 그럼 단상에 올라가서 한바탕 선전을 하지요. 그 땐 ‘코린’이라는 미제 구호물자 연필과 일본에서 건너온 연필들이 주로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생산한 <문화연필>, <동아연필>이 시판에 들어가긴 했지만, 품질이 따라주지 못 해서 여간 고전을 한 게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국산품 애용 교육’ 차원에서 연필 행상이 찾아가면 그렇게 배려를 해 준 겁니다.”

돈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외상으로도 팔았다. 외상값은 각 학급의 담임교사가 명단을 작성해서 다음 날 거출했다가 나중에 연필장수에게 건네주었다. 학사(學事)에 관한 용무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외부인이 교정에 진입하는 것 자체를 철저히 통제하는 요즘의 상황과 견주어 보면, 그야말로 옛날 얘기다. 하기야 당시엔 연필을 공급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학사’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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