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지난 3일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에선 가남일호(벼 종자) 피해 농민들이 여주시농협조합공동사업법인(통합RPC)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공판이 열렸다. 지난 2022년 통합RPC는 ‘수확이 빠르고 생산량도 많다’며 가남일호를 극조생 수매계약 품종으로 선정하고 적극 권장했다.
여주시 가남면 일대에서 일부 농가들이 자가 채종으로 수년째 재배해 이름도 가남일호가 된 이 품종은 국립종자원 등록 종자는 아니었다. 통합RPC는 ‘3년간 시범재배’를 했다며 재배 교육을 진행했고 ‘빠른 수확’을 시장 경쟁력으로 강조했지만, 결국 그해 가남일호 재배 농가는 ‘쫄딱 망했다’. 생산량이 30~60% 줄어 수매계약 물량마저 채우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피해 농민들은 ‘가남일호 피해자 여주시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농협과 가남일호로 수매계약한 170여 농가 가운데 당시 대책위엔 100여농가까지 참여했다. 통합RPC는 200평당 9만원을 보상하는 것으로 수습했고, 이를 거부한 40여 농가는 지난해 2월 국립종자원에 민원을 내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소송 가액은 6억5600여만원)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1년, 가남일호 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국립종자원은「종자산업법」위반 혐의로 통합RPC를 검찰에 송치했고 기소유예 처분이 났다. ‘가남일호 사건’은 농민들에게 경제적 손실은 물론 전국 ‘최고의 쌀’을 생산한다는 자부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농민 전용중(대책위 사무국장)씨는 이를 농민의 의견과 이익은 안중에 없는 통합RPC 운영구조의 결과물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3일 공판 증인석에 섰던 그에게 그간의 상황을 들어 봤다.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통합RPC쪽 변호 취지는 과거에도 합법적이지 않게 고시히카리·히토메보레(일본 품종) 등 벼 종자를 ‘문익점'식으로 들여왔고 농민들 소득에도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조합장들이 그해 추석이 빨라서 일찍 나오는 종자로 잘해 보려다 `실수’한 셈이란 거다. 기소유예 처분 이유도 비슷할 것 같다. 핵심은 종자산업법 위반에 대한 건 유죄라는 거다. 기소가 유예됐을 뿐 죄가 없다는 건 아니잖나. (종자산업법상 종자를 생산하거나 수입해 판매할 땐 반드시 신고해야 하며, 판매·보급 땐 법정 품질표시를 지켜야 한다.)
쟁점은 가남일호가 불량종자인지 여부다. 보통 종자 싸움을 할 땐 문제 종자가 원종과 무엇이 다른지 유전자 분석 등을 통해 밝혀내는데, 가남일호는 원종을 모른다는 게 문제다. 비교할 대조군이 없으니 증명할 방법이 없다. 이런데도 소를 제기한 농민들더러 증거를 내라니 애초부터 말이 되나. 밝힐 수 없으니 통합RPC쪽은 자신 있다. 게다가 일부 피해 농가들이 농작물재해보험금을 받았고, 농가마다 생산량도 다르니 ‘이번 사태는 농법의 잘못이나 재해였지 종자 문제가 아니라 걸 농민들도 인정한 것 아니냐’라고 나온다.
당시 무엇이 가장 문제였나
우린 통합RPC에서 교육받고 지침대로 했다. 지금까지 재배한 조생종 중에 이런 일은 없었다. 우리가 기상청 자료를 분석하니 그 해는 전해와 일기 차이가 크지도 않았다. 4월 말~5월 초에 심었는데 5월 말쯤 되니 벌써 이상징후가 보였다. 일부 조합장들은 ‘지금이라도 빨리 벼 보험에 가입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조합장들도 문제를 인지했다는 거다. 통상 벼 보험은 연초에 가입하는데, 계약일자가 있으니 보험 계약서가 그 증거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키도 작은 데 6월 들어 이삭까지 나오니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농업기술센터에선 ‘그 벼는 원래 이삭이 나오면서 키도 같이 큰다’는 식으로 안심시켰다. 그런데 그게 끝이었다. 키도 작고 이삭도 앙상했다.
여주에서도 북쪽에 있는 가남·흥천이 피해가 컸다. 우린 이 종자가 냉해에 약한 걸로 본다. 고정된 종자(반복 채종해 심어도 해마다 똑같은 작물이 나옴)는 자가 채종해서 쓸 수 있다. 우린 가남일호가 어디서 온 건진 모르지만 고정종이 아니고, 냉한 상태에서 계속 자가 채종하다 보니 퇴화한 걸로 추정한다. 이 역시 증명이 어렵다.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린 통합RPC의 주먹구구식 업무방식을 지적한다. 아무리 선의로 종자를 보급했대도 잘못됐다면 인정하라는 거다. 조생종으로 가남일호 전엔 히토메보레를 쭉 지었는데, 이건 로열티나 한일 간 분쟁 소지가 있어서 가남일호로 바꾼 건데 쫄딱 망한 거다. 그 다음 이천에서 지었던 진옥으로 했다가 밥맛이 안 좋아 올핸 진광으로 정했다.
이처럼 장기적 비전이나 고민 없이 품종을 선정하다가 터진 게 가남일호 문제다. 여주·이천은 전국에서 가장 비싼 쌀값으로 시장경쟁을 하다 보니 이천보다 빨리 출하하는 게 조합장들의 지상과제다. 이천 쌀이 더 고가라 여주 조합들은 열등감이 좀 있다. 그러니 장기적으로 여주에 맞는 종자를 개발하기보단 ‘이천에선 뭘 심는다는데 그거보다 빠른 건 없을까’에만 골몰하다 이 사태가 난 거다. 불량종자 여부만이 아니라 사실상 업무상 과실이란 게 더 큰 문제인데 법정에선 불량 여부만 쟁점이 되고 있어 속이 터진다.
소송까지 가게 된 이유는
농협 입장에선 조생종 재배 농가는 효자다. 일찍 시장에 내서 비싸게 팔리니까. 그렇게 충성을 다해온 농가들이 막대한 피해를 봤으면 통합RPC가 책임을 공식 인정하는 게 먼저다. 수매계약은 200평당 12포대(1포대당 조곡 40kg)까지 9만원을 쳐준다. 그 이상에 대해선 수매가를 차감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가남일호는 12포대를 채운 농가가 없다. 조생종은 원래 좀 양이 나오는 데도 그랬다. 보통 14~15포대씩 하던 농가들도 잘해 봤자 9~10포대에 그쳤다. 계약물량도 못 채운 거다.
그런데도 목소리 큰 조합장들은 ‘책임을 인정했다간 본전 뽑으려고 덤빌 거다’란 태도였다. 물론 일부 조합장은 농협이 분명히 잘못했다는 입장이었지만 대체적 분위기는 안 그랬다. 우리도 농협을 안 믿지만 조합장들도 농민들을 믿지 않는 거다.
처음 농민들은 농협이 어려우면 피해금의 50%만 보상하라고 제안했지만, 통합RPC는 오히려 종잣값의 50%만 보상하자는 식으로 의논했더라. 그때 이사회 자료를 보면 그렇다. 결국 200평당 보상금 9만원에 일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통합RPC의 조건을 농가들이 수용하면서 40여 농가만 남아 소송에 나섰다. 피해 났다고 농협에서 돈 준 게 처음이라 농가들이 우르르 받아버린 거다.
농민회가 있거나 자체적으로 모였던 지역은 그나마 버텼다. 개인의 판단이니 말리진 않았다. 소송 중인 농가들도 청구한 배상액이 몇천만원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크진 않다. 위로금인 셈인데, 우리가 처음 요구했던 50%에서 조금만 보태면 지급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런데도 통합RPC는 대형법무법인까지 동원해 농민들과 맞서고 있다.
통합RPC 태도에 실망했겠다
소송에 나선 농가들도 그간 조합에 우호적이었고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피해도 피해지만 ‘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느냐’며 나선 건데 그걸 이해 못하더라. 기소유예 처분 났을 때 통합RPC 대표(피고, 3월 신임 대표이사 취임으로 전직 대표이사)가 싱글벙글하더라. 죄가 없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우린 솔직히 책임 인정하고 앞으로 조합원들과 잘 의논해서 운영하겠다고 하길 바란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다. 농협의 종자 선택은 농협의 사업일 뿐만 아니라 지역 쌀 산업 예산이 투입되는 지역 농정의 중대 사안이다.
이에 농업기술센터 소장이 통합RPC 운영협의회에도 참여한다. 그런데도 여주시장은 물론 센터 소장도 제 역할을 안한다. 책임의 30%는 여기에 있다. 전국 유일의 쌀 특구로서 책임과 역할이 필요하다. 아울러 선의로 가남일호를 선택한 것이므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도 잘못됐다. 통합RPC는 경영체다. 잘못된 경영은 당연히 책임져야 한다.
이 싸움의 의미는
가남일호 농협 출하자 170여 농가 가운데 40여 농가가 소송까지 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농협에 대한 농민들의 불신이 드러났고, 농협을 개혁해야 한다는 걸 많은 농민이 통감한 거다. 이번 소송과 함께 농민이 농협의 주인이 되기 위한 개혁 논의가 계속돼야 한다. 조합원(농민)의 이익과 조합(직원)의 이익이 배치되는 현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현장에서 농협은 언제나 ‘공공의 적’일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