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기후정의 실현 위한 농민운동, 우리 모두의 운동”

[인터뷰] 채효정 '오늘의교육' 편집위원장

  • 입력 2024.01.01 00:00
  • 수정 2024.01.01 00:15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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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시간강사 부당해고를 규탄하며 대학(경희대학교)에 맞서 투쟁한 노동자, 대학의 기업화와 비민주성 문제를 지적하며 학내 투쟁을 진행한 정치학자,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의 실현을 촉구하며 다양한 실천을 벌이는 운동가, 그리고 강원도 인제군에 귀농해 농사짓는 농민.

채효정 <오늘의교육> 편집위원장의 이상과 같은 치열한 삶과 이력을 한정된 지면에서 어찌 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채효정 위원장은 현장 농민의 관점에서 기후위기 문제,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기후정의 실현’을 이야기하는 몇 안 되는 학자 중 한 명이며,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분투하는 농민의 ‘동지’라는 점 말이다.

채 위원장은 기후정의 실현의 주체는 농민임을 여러 매체 및 공개석상에서 강조해 왔다. 기후위기 시대 농업·농촌·농민에 대한 채 위원장의 생각을 듣고자, 지난해 12월 26일 인제군 서화면 평화도서관에서 그를 만났다.

인제에 귀농한 이래의 농사 이야기를 듣고 싶다.

처음 귀농해서 시작했던 블루베리 농사는 망했다. 지금은 블루베리 농사를 작파하고 텃밭 농사만 한다. 그러나 블루베리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나라엔 분명한 농업 정책이 있다는 건 알게 됐다. ‘소농 말살정책’이다. 농민에게 대농·기업농이 되라고 몰아가면서 소농이 자연스레 없어지게 만드는 상황이다.

지자체와 농업기술센터 등에선 블루베리가 고수익·환금성 작물이라며 농민에게 블루베리 농사를 권했다. 귀농했던 마을 전체 주민이 블루베리로 작목을 전환하던 차에, 나도 그분들에게 의지할 겸, 노하우도 배울 겸 블루베리 농사를 시작했다. 블루베리 재배를 권하던 이들은 재배 과정의 좋은 점만 이야기해줬다. 그러나 농사 과정에 어느 정도의 노동력이 들어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이 블루베리 나무가 인제의 식생에 적당한지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었다.

농민들에게도 블루베리는 낯설었다. 옥수수·감자 농사는 눈감고도 짓는 베테랑들이지만, 블루베리에 한해선 나와 다를 바 없는 초심자였다. ‘전문가’에게 블루베리 관련 수업을 들으며 어리둥절해 하던 농민들을 보며 나도 어리둥절했다.

지금은 텃밭에서 감자·고추·토란·땅콩 등 고루고루 심고 싶은 걸 심는다. 블루베리 농사는 망했지만, 처음부터 텃밭 농사만 지었다면 농촌 현실을 제대로 알기 힘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인제에서 실감하는 기후위기는?

우선 ‘꽃시계’가 망가졌다. 농민들은 어느 계절, 어느 시점에 어떤 꽃이 피는지 확인하며 그 시기에 적합한 농사일을 해왔다. 그런데 꽃시계가 망가짐으로써 그동안 자연스레 가늠했던 농작업 시점을 전혀 가늠할 수 없게 됐다.

인제에서 아카시아 꽃이 예년보다 굉장히 일찍 핀 적이 있다. 꽃이 갑자기 피고 빨리 졌다. 벌들은 아카시아에서 꿀을 얻고자 예년과 같은 시기에 출현했는데 꽃이 없으니 당황스럽다. 이는 토종벌을 키우는 농민들로서도 치명적인 상황이다.

꽃시계의 고장, 병충해 증가 등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쌓이니, 이는 농민의 노동 과부하로 이어진다. 노동 강도도 세지고, 원래 한 번 작업하면 해결 가능했던 일이 반복적으로 해도 안 끝나서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면서 농민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주의력·집중력은 떨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선 안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안전사고가 발생해도 ‘개인의 부주의’로 책임이 전가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농민 노동시간 증가 및 노동 강도 심화는 구조적으로 농민 개인의 건강·안전문제로 이어진다. 이는 전형적인 ‘느린 폭력(장기간에 걸쳐 이어지는 구조적 폭력)’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한다며 정부는 스마트팜 등 기술적 대안을 농민에게 이야기한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농업을 농민의 활동과 농촌의 가치로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대신, 농업체계를 자본과 기업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재편하고자 기후위기라는 대재난을 이용하는 게 작금의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스마트팜·식물공장 등 기술주의적 대안이 거론된다. 기술주의적 대안엔 필연적으로 자본이 수반되는데, 이는 소농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다.

스마트팜을 갖추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지 않냐는 의문을 제기하면 “자기 돈으로 집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고들 한다. 그 과정에서 재무설계사 등이 끼어서 컨설팅을 해주고, 손익분기점은 어떻고, 빚은 어떻게 갚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농민들은 안다. 겉으로는 농업경영인으로서 ‘사장님’ 소리를 듣지만, 실상은 (스마트팜 시설을 갖추는 과정에서 생긴 막대한 빚으로 인해) 대출 갚는 노예 신세라는 걸 말이다. 인제 농민들은 스마트팜 등 기술 중심주의적 대안 이야기에 혹하지 않으며, 허황된 소리라고 여긴다.

기술주의적 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농민을 ‘대상화’한다는 점이다. 농민을 농정 전환 과정의 변혁 주체로 보지 않고, 신기술을 ‘가르칠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블루베리 교육 당시 우리 농민들의 모습이 어찌 보면 그런 식으로 대상화된 모습이 아니었을까?

덧붙여, 농촌이 ‘에너지원’으로서 거론되는 상황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기후위기를 핑계 삼아 농촌을 에너지 생산지로 삼겠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농업의 ‘정의로운 전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농민의 불만을 어떻게 무마시킬까?”, “보상은 어떻게 할까?” 등이 주를 이룬다. 농민을 피해자화, 대상화하는 셈이다.

대상화로 인해, 사회 전체의 정의로운 전환 과정에서 주력이 돼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적대세력으로 변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이런 양상은 최근 유럽 각지에서 나타난다. (농민을 대상화해 왔던) 환경정책에 대해 적대적인 목소리를 내며 극우 정치세력화한 농민정당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기후위기 대응책마다 ‘탄소중립’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 표현은 어떻게 생각하나?

감언이설이자 기만적인 용어다. 탄소중립이라는 용어는 쓰면 안 된다. 탄소상쇄(어떤 영역에서 탄소 배출량을 늘리면 다른 영역에서 배출량을 줄인다는 개념)라는 기만적 셈법을 도입함으로써 기업에 살길을 열어주고 있다. 탄소 ‘흡수원’을 마련하면 되니까 기업은 얼마든지 탄소를 배출할 수 있게끔 정당화시켜주는 게 탄소중립의 논리다. 이런 논리라면 핵발전도 대안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다.

탄소중립 기조를 끌고 갈 시, 농촌은 공동체적이고 생태적 공간이 아니라 ‘탄소흡수원’으로서나 ‘메탄가스 배출원’으로서 호명될 뿐이다. 숲속 나무의 호흡마저 금액으로 치환해서 판매하는 형국 아닌가. 우리는 탄소중립이라는 단어의 기만성을 폭로해야 한다. ‘배출량 감축’, ‘배출제로’라는 정확한 방향을 이야기해야 한다.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농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농민운동의 강화가 중요하다. 기후위기는 농업·농촌의 위기를 겪던 농민들의 입장에서 반격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만 아직 국내 기후정의운동 내에서 농민의 목소리는 주변화돼 있는 게 사실이다. 이건 오류라기보단 한계 때문인 듯하다. 어쨌든 기후정의운동 활동가 중에도 도시 활동가들이 많고, 농민 인구가 적으니 대변하는 목소리가 적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다.

농민운동을 농민 당사자만의 운동으로 여기지 말자. 기후위기 시대 농촌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라는 관점에서, 농민운동을 농민 이외의 다양한 시민이 함께하는 공공의 운동으로서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 일종의 ‘농업수호운동’, ‘반자본 농민운동’으로서 새롭게 운동을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기후정의운동과 관련해, 지난해 두 차례 열린 대규모 기후정의투쟁(4.14 기후정의파업, 9.23 기후정의행진)을 농민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하나? 9.23 기후정의행진의 경우 농민이 기후위기로 겪는 어려움에 대한 무대 위 발화(본대회 기준)가 없었던 게 아쉽다는 평도 있었다.

농민운동 단체들의 조직적 결합이 미약했다고 본다. 그러나 무대 위 발화가 없었던 것과 별개로, 9.23 당시 현장에서 새로운 농부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농사가 혁명이다’, ‘발전 대신 밭 전(田)’, ‘공사 대신 농사’ 등의 체제 전환적 구호를 내걸고 온 각지의 청년 농민들과 대안학교 학생들을 보며 ‘어, 뭔가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는 건가?’란 생각이 들었다.

노동운동 과정에서도 그동안 노동조합 중심의 기존 노동운동 체제 밖에 존재하던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가 노동운동의 또 다른 주체로서 등장하고 있지 않나? 마찬가지로 농민운동의 장 안에서도 그동안 조직되지 않은 농민 대중들이 새로운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는 듯하다. 이 흐름을 잘 파악하면서, 이러한 주체들을 농민운동 과정에서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지가 향후의 과제인 듯하다.

지난해 4월 1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일대에서 열린 ‘4.14 기후정의파업’에 참가한 4,000여명의 시민들이 각양각색의 손팻말을 들며 기후위기 시대, 기후정의를 향한 사회공공성 강화와 생태학살 중단 등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해 4월 14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일대에서 열린 ‘4.14 기후정의파업’에 참가한 4,000여명의 시민들이 각양각색의 손팻말을 들며 기후위기 시대, 기후정의를 향한 사회공공성 강화와 생태학살 중단 등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대안 모색과 관련해, 전농·전여농 등 농민운동 조직들은 기후위기 상황에서 ‘국가 책임 농정’ 실현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에 국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현재의 신자유주의 국가체제는 ‘자본의 집사’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국가와 자본 권력이 맺은 지배동맹 체제는 철저히 사익을 추구할 뿐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에 반대하며 국가 주도 ‘통제’와 ‘규제’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좌·우파를 막론하고 커지고 있다. 그중 지배세력의 요구는 무엇인지, 농민·노동자의 요구는 무엇인지 잘 분간해야 할 때다.

국가에 무엇인가를 요구할 땐 ‘우리가 국가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려면 농민운동의 힘을 키우는 것 외엔 답이 없다. 물론 정책 제시도 중요하다. ‘국가 책임 농정’ 요구의 경우 국가 주도 계획경제를 통해 농업을 챙겨야 한다는 뜻 아닌가. 타당한 주장이다. 다만 그 주장이 정책적 아이디어만으론 실현 불가능하니, 그걸 가능하게 만들 힘을 키워야 한다.

한편으로 농업계에선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친환경농업과 채식의 확대 또한 이야기한다.

채식식단이나 유기농 상품만으로 현재의 위기를 끝낼 순 없다. 사실 ‘친환경’이라는 구호·담론마저 (유기농산물 기반 식품의 생산·가공·유통 체계를 장악한) 자본에 의해 포획됐다고 생각한다. 채식 담론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선 엄청난 수의 도살(공장식 축산 과정의 동물 도살)을 하면서, 다른 생산라인을 만들어 ‘비건’ 상품을 내놓는 것이다.

긍정 담론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말고 뒤를 봐야 한다. 그래야 기후위기의 주범이, 학살자가 보인다. 농민의 관점에서 학살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글로벌 농기업과 WTO 체제라고 답할 수 있다. 이러한 구체적 대상에 맞서는 투쟁을 해야 한다. 그 투쟁 과정에서 ‘농업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과제가 배치돼야, 진정한 의미의 농업 분야 대안 실현도 가능하다.

위원장이 인제에서 참여 중인 ‘자치와 자급’ 모임의 활동도 궁금하다. 2022년·2023년 기후정의행진 때 모임 차원에서 결합했던 것으로 안다.

‘자치와 자급(자자)’ 모임은 2015년 이래 한 달에 두 번씩 모임을 가져왔다. 구성원은 인제군 거주민들이다. 이들과 함께 지난 8년간 꾸준히 독서모임도 갖고, 영화 상영회도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여 왔다.

나무가 늦게 자라면 그만큼 더 단단해지고, 뿌리도 깊고 튼튼해지지 않나? 자자 모임이 그렇다. 모임을 시작한 이래 8년 만에 함께 집회(2022년 9.24 기후정의행진)를 나갔고, 택배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하며 “인제에도 당신들(택배노동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도 자자 모임은 어떤 식으로 각지의 투쟁현장에 연대하고 결합할지를 논의한다. 그 과정에서 관련 내용으로 학습을 진행하고, 투쟁 현장에 대한 이해를 키움으로서 정치의식을 함께 키워왔다.

언젠가부터 시민사회운동은 ‘지역’에서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일을 소홀히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현장 기반, 지역 기반 풀뿌리 운동 없이는 안 된다. 아무리 당장의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결국 풀뿌리 운동 강화 여부에 따라 운동의 미래가 판가름나리라 본다.

농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서로 사라지지 말자. 나도 사라지지 않겠다. 그 말은 꼭 하고 싶다.

인제에서 청소년들을 만나 교육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농업은 미래의 가장 전망 있는 산업이고, 인간이 존재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밖에 나가서 다양한 경험도 하고, 많은 것도 봐야 한다. 하지만 (인제로)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와라”고 말이다. “다시 이곳에 오면 내가 있을 거야. 약속해. 여길 지킬 거야”라고.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농촌은 ‘소멸’하지 않는다. 아니, 사라질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사라질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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