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10명 중 8명 권리 보장 못 받아’도 법제도는 부실

유엔농민권리선언 제도화 방안 마련 국회토론회 열려

농민권리 실태조사 결과 발표, ‘생계·생존권 위기’ 심각

  • 입력 2023.11.03 09:41
  • 기자명 김수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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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유엔농민권리선언이 천명한 농민권리 보장을 위해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할까? 전국 농민 553명이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에 나타난 농민권리 침해 실태를 바탕으로 방안을 짚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투데이신문사, 유엔농민권리선언포럼, (사)농업농민정책연구소 녀름이 주관하고, 소병훈·어기구·이원택(더불어민주당), 강은미(정의당), 강성희(진보당) 의원이 주최한 ‘유엔농민권리선언 제도화 방안 마련을 위한 국회토론회’가 지난 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2018년 채택된 유엔농민권리선언은 농민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28개 조항에서 명시한다. 농민들은 이 가운데 ‘생산비 폭등, 농업소득 감소로 인한 생계와 생존권 위기(66.1%)’를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꼽았다. 이는 이번 토론회에 앞서 진행된 ‘기후위기와 식량위기 시대에 필요한 농민권리 실태조사’ 결과다(투데이신문사 의뢰로 녀름이 9월 12일부터 30일간 만 18세 이상 전국 농민을 대면 조사. 응답률 91.1%(607명 중 553명), 오차범위 95% 신뢰수준에 ±4.0%).

농민 10명 중 8명, ‘농민권리 보장받지 못해’

이번 설문조사에서 현재 농민권리 보장 수준이 상당히 낮은 상황이 드러났다.

농민 10명 중 8명(76.7%)은 농민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고 답했고, 이는 30대 이하와 80대를 뺀 전 연령에서 높게 나타났다. 농민 중 절반(10명 중 5명)은 권리를 침해받아도 ‘그냥 넘어갔다.’ 10명 중 7명은 농지·자연자원·종자 등 생산수단을 이용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고 답했다. 부정적 응답률은 ‘정책, 개발사업 결정 등에 참여권과 정보 제공(10명 중 8명)’,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10명 중 7명)’, ‘생물다양성 보존, 생태·친환경농업을 추구할 환경(10명 중 7명)’,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 적절한 수입과 생계 보장(10명 중 8명)’, ‘여성농민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하게 참여할 권리(10명 중 7명)’에서도 높았다.

지난 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유엔농민권리선언 제도화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이수미 녀름 부소장이 농민권리 실태조사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유엔농민권리선언 제도화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이수미 녀름 부소장이 농민권리 실태조사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조사 결과를 발제한 이수미 녀름 부소장은 “적절한 수입과 생계보장에 대한 문항에서 부정적 응답률이 가장 높았다. 생산비 폭등, 농업소득 하락이 매우 심각한 상황임이 여실하다”라고 짚었다.

아울러 73.3%가 농업에 대한 국가 책무가 매우 크다고 답했다. 조사 지역 9개 가운데 경기(인천)를 제외한 8개 지역, 50대 이하, 농업 규모 3,000평 이하 및 5년 이하의 농업종사자에서 응답률이 높았다.

이 부소장은 “응답자의 97%가 농민권리 보장을 위해 농민기본법과 같은 입법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는 가장 높은 수준의 긍정 응답률로 농민들이 그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라며 “아울러 10명 중 9명이 30년간 개방농정 속에서 사람보다 산업이 중심이었던 패러다임을 높은 수준(87%)으로 우려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농민의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으나 이에 적극 대처하기보다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게 큰 문제다. 제도와 구조를 개선해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농민권리 제도화 위한 세 가지, ‘실태 파악·영향평가·법제화’

농민권리 보장의 현실은 미약하지만, 법제화·제도화는 갈 길이 멀다.

‘농민권리선언 제도화의 방향’을 발제한 송원규 유엔농민권리선언포럼 운영위원은 ‘스마트팜이나 기업 경영체 등 대농 중심의 정책 설계’를 강조하고 소농이 아닌 규모화한 농민을 농민으로 정의하려는 농정 당국의 인식을 들며, ‘농민권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농민권리 제도화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농민권리선언은 전 세계 소농의 권리 보장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다.

이에 송 운영위원은 농민권리 제도화를 위해 △농민권리 실태 파악 △농민권리영향평가 도입 △농민권리법제화를 제시했다.

지난달 11일 열린 제54차 유엔인권이사회에서 각국의 농민권리선언 이행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실무그룹을 3년(2024~2026년)간 운영하기로 결정해 실태 파악은 이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도 있다.

송 운영위원은 “주요 농어민단체, 농식품부, 국가인권위, 인권단체, 농업 및 인권 전문가가 참여하는 한시적 거버넌스를 운영할 수 있다”라며 “이를 향후 공식적인 국내 모니터링 및 이행 촉진 기구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농민권리선언 논의가 업무 영역이 아니라도 농식품부가 이 논의에 참여하길 바란다. 농민권리선언의 이행과 국제 모니터링 참여 방안을 다 함께 논의하는 자리가 시작돼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각종 대규모 개발사업 등으로 농촌 환경이 파괴됨에 따라 농민이 삶터와 농사 기반을 빼앗기는 문제를 막는 장치로는 농민권리영향평가 도입이 시급하다. 이는 개발사업이 농민의 주거·농지·공동체·인프라·생계·생물다양성·환경안전성·참여권·민주적 절차 등에 미칠 영향을 사전 평가하는 제도다. 송 운영위원은 “이는 가장 시급한 제도화 과제”라고 강조했다.

농민권리선언과 관련된 주요 국내법(헌법,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기본법, 농지법 등 17개)을 농민권리선언을 바탕으로 전면 개정하거나 새 법률 제정도 검토해야 한다.

송 운영위원은 “현행법은 농민권리선언의 방향성과 권고를 고려한 것이 아니어서 권리 보장 측면에서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라며 “농민의 정의, 실제 경작자지만 농지 문제로 정책 대상에서 제외되는 문제, 고용보험·산재보험 등 사회적 안전망에서 제외되거나 농업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이 배제되는 문제 등이다”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단순히 시혜적 관점에서 농민을 배려하는 것이 아닌 기후위기, 식량위기, 지역위기라고 하는 지구적·시대적 위기 상황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농업·농촌으로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농민권리선언의 제도화가 진행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이근혁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 문영미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식량주권위원장,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이효희 경기지속가능농정연구소장, 정아름 농식품부 농촌정책과장이 토론에 나섰다.

정아름 농촌정책과장은 “농민권리선언 제도화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납득하기 어렵다. 유엔이 채택했대서 정부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긴 어렵다”면서 “전면 개정보다는 농업농촌기본법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농촌 난개발에 따른 주민 건강 대책으론 내년부터 시행하는 농촌건강계획이 있고, 농어촌주민의 삶의 질과 관련해 농어촌영향평가가 있다. 제도화 과정은 정착되고 효력을 갖기까지 국민적, 범부처적 공감대와 에너지가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신중히 제안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이근혁 정책위원장은 “우리 농민들은 실제로 30년이 넘는 과정에서 정책이 가져온 결과물을 너무나 잘 알기에 본질적으로 법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그것이 농민기본법이다. 실제로 피해 보고, 구조적으로 권리를 침해받아 온 농민들의 실제 목소리가 가장 많이 반영됐다. 이 목소리가 정책에 담겨야 실질적 변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하승수 대표는 농촌 난개발과 환경오염 시설 문제에서 농민의 정보 접근권, 참여권, 민주적 의견 수렴, 주민 건강 영향 평가와 사법 접근권 등의 보장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문영미 식량주권위원장은 여성농민들의 농생태학 연구, 식량주권 운동과 토종씨앗 육성 등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후위기 시대 작물 다양성과 농민의 종자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효희 소장은 소농의 자급과 소득 기반 확대를 위해 농산물 가공에 대한 법적 규제를 넘어설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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