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농의 토종씨앗 보전 노력, ‘인권’으로 보장받아야

  • 입력 2022.10.30 18:00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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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소농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의 종자와 전통지식을 유지·관리·보호·육성할 권리를 가진다.”

지난 2018년 국제연합(유엔)에서 통과된 <소농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선언(유엔농민권리선언)> 제19조 ‘종자에 관한 권리’ 2항의 내용이다. 이 내용대로라면, 온갖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토종씨앗 보전을 위해 노력하는 소농의 노력은 그 자체가 ‘인권’의 영역에서 보장받아야 한다.

유엔농민권리선언 제19조는 또한 소농의 “재배하길 바라는 작물과 종류를 결정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규정하며 “당사국은 농업연구개발이 소농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부합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은 유엔농민권리선언에 대해 ‘기권’ 입장을 표한 한국 정부의 눈엔 사실상 들어오지 않는 내용이다.

토종콩 농사를 지속하는 단 하나의 이유, “지키기 위해”

경북 안동시 임하면 농민 고갑연씨가 토종콩 재배 논에서 콩을 따고 있다.
경북 안동시 임하면 농민 고갑연씨가 토종콩 재배 밭에서 콩을 따고 있다.

경북 안동시 임하면에서 다양한 밭작물을 재배하는 고갑연씨는 아주까리밤콩·서리태 등의 토종 콩류를 재배한다. 800평 규모 농지 중 토종작물 재배농지는 약 300평으로, 논에서 벼 대신 토종 콩을 재배한다.

대원콩·선풍 등의 정부 보급 신품종 콩은 논 또는 밭 한 마지기(약 200평)당 수확량이 잘 나오면 300kg 이상도 나오는 반면, 아주까리밤콩·서리태·쥐눈이콩 등의 토종 콩은 그보다 수확량이 적다. 150평 논에 심은 아주까리밤콩의 올해 수확량이 150kg 나오리라는 게 고씨의 예상인데, 이를 한 마지기당 수확량으로 환산하면 200kg 가량이다.

지난해엔 50평 논에서 약 90kg의 아주까리밤콩을 수확했으니, 면적당 생산량으로 치면 지난해보다 오히려 생산량이 줄었다. 지난해 쥐눈이콩 농사가 잘 안돼서 올해는 아주까리밤콩을 심은 논 바로 옆 논에 서리태를 심었는데, 고씨는 서리태 수확량은 아주까리밤콩보다 훨씬 더 적으리라고 예측했다.

지난 25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농민 고갑연씨가 밭에서 수확한 토종 콩들을 손에 올려 보여주고 있다. 검은색 콩이 서리태, 갈색에 흰무늬가 있는 콩이 아주까리밤콩이다.
지난 25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농민 고갑연씨가 밭에서 수확한 토종 콩들을 손에 올려 보여주고 있다. 검은색 콩이 서리태, 갈색에 흰무늬가 있는 콩이 아주까리밤콩이다.

고씨는 “5월말~6월초 사이에 서리태와 아주까리밤콩을 심었는데, 올해는 예년보다 기후조건이 안 좋았다”며 “여름 내내 아주 바싹 가물었다. 모종이 자라던 시기엔 가물어서 말라죽은 모종들이 많더니만,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엔 비가 많이 와서 콩 열매 수정이 잘 안 됐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예년보다 작황이 안 좋았다”고 증언했다.

토종작물 재배 시엔 제초제를 사용하면 안 되기에, 올해 74세의 고씨는 79세의 남편과 함께 날마다 토종 콩을 심은 고랑에서 잡초를 제거했다. 일반농가들이 잡초 억제를 위해 피복하는 비닐도 덮지 않는다. 대신 복토, 즉 씨앗을 심은 공간을 흙으로 덮는다. 복토 작업도 고령의 부부에겐 엄청난 노동이다. 인력은 고용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고씨는 “인건비가 하도 올랐다 보니 사람 고용하면 남는 수익이 없다”고 말했다. 논·밭고랑에 투입할 수 있는 복토기가 있지만, 이 기계도 200만원대의 고가라 고씨 부부 입장에선 부담이 크다.

힘들게 재배한 토종 콩의 판로는 언니네텃밭과의 직거래뿐이다. 학교급식도, 그 밖의 공공급식 영역도 토종작물과는 상관없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고씨가 토종 콩 농사를 짓는 이유는 단 하나, “지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경상북도엔 토종농작물 보전을 위한 조례는 있으나, 고씨처럼 현장에서 토종작물을 지키는 농민을 위한 지원책은 없다. 전국 광역지자체 중 토종작물 직불금을 지급하는 곳은 경상남도와 제주도뿐이다.

고씨는 “경북도의 농정은 지역의 주요 품목인 사과·포도 등 과수류 분야에 대한 지원·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지역 내에서 소농들이 재배하는 토종 밭작물에 대해선 이렇다 할 정책이 없다”며 “우선 고령농이 논·밭고랑에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저렴한 기계의 개발·보급이 시급하다. 그래야 토종씨앗을 지키고자 하는 고령농들의 농사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토종작물 보전·확산 역할은 온전히 농민의 몫

‘의무감’ 하나로 일반 콩 농사보다 몇 배는 힘든 토종 콩 농사를 영위 중인 74세의 고갑연씨 반대편엔, 종자 ‘산업’ 육성에 신경 쓰면서도 정작 현장에서 토종종자를 지키는 농민은 소외시키는 정부·지자체가 있다.

지난 13~15일 전북 김제시 민간육종단지 일대에서 농림축산식품부·전라북도 등의 주최로 열린 2022 국제종자박람회는 종자산업 육성을 위해 국내외 종자기업이 모여 최신 종자의 우수성을 알리는 자리였다.

그러나 당초 국제종자박람회에선 토종씨앗 관련 전시계획은 빠진 상태였다. 이에 오은미 전북도의원이 주최 측에 토종씨앗 관련 부스 설치를 요청했고, 그 결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북도연합과 김제시여성농민회에서 박람회장에 ‘토종종자 전시마당’을 설치했다. 이 장면만으로 정부의 종자 관련 정책을 전부 평가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농식품부가 토종씨앗 재배농민들을 의식적으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건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정부·지자체의 무관심 속에서 결국 토종작물 재배·가공 및 판로 확보, 토종씨앗 가치를 알리기 위한 교육 등의 노력은 온전히 농민들의 몫이다. 특히 여성농민들의 노력은 가열차다.

경남 거창군에선 거창군여성농민회가 △‘작은농부학교’ 운영을 통한 토종씨앗 가치 알리기 △토종콩으로 장 담그기 △토종벼 논에서의 통일기원 모내기 행사 등을 진행해 왔다. 거창 ‘카페아날 협동조합’의 경우, 거창 여성농민들과의 공조하에 거창 토종팥을 활용한 팥라떼·팥빙수 등을 만들었다.

신은정 거창군여성농민회 토종사업단장은 “여성농민들이 토종작물 보급 확대를 위해 애쓰고 있지만, 최근 거창 푸드종합센터의 운영상 어려움으로 인해 거창 토종작물의 지역 내 선순환이 앞으로도 지속될지가 걱정”이라며 “현재 거창군의 토종작물 재배농민 평균 연령대는 80대다. 정책적으로 토종농작물 직불금을 확대하고, 소농이 토종작물 재배에 참여할 수 있는 정책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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