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표현이라 해도 다사다난 말고는 달리 쓸 단어가 없을 2023년 한 해도 그 꼬리를 감추고 있다. 나라 안팎이 숨 가쁘게 돌아간 올 한 해, 숱한 사람이 들고 나기도 했던 지리산 자락에도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풍운아처럼 지리산과 수도산을 넘나들던 반달가슴곰 오삼이도 그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우리 초록걸음 길동무들도 변함없이 지리산의 실핏줄 같은 그 길들을 걷고 또 걸었다.2023년 지리산은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로웠고 그 위태로움은 쉬 끝나지 않을 듯싶다. 산청과 함양의 케이블카, 남원 산악열차, 구례의 골프장과 양
12월 15일(양력),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본대가 후퇴를 거듭하여 전주에 이르렀다. 청주성 전투에서 패한 김개남은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류하여 함께 전주로 들어왔으나 곧 다시 헤어졌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나주를, 순천의 김인배는 전라좌수영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 이들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전봉준은 12월 21일과 23일 원평과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른 후 부대를 해산하고 잠행에 들어갔으나 28일 순창 피노리에서 피체되었다. 하루 앞선 27일 손화중과 최경선이 부대를 해산했다. 이날 태인에서 피체된 김
지난여름의 긴 장마에 잦은 가을비까지 더해져 올해 지리산의 단풍 농사는 영 시원찮다. 단풍나무류의 단풍은 그 어느 해보다 우중충한 민낯으로 가을을 맞았다.광합성에 최적화된 초록잎으로 화장을 하고는 햇빛을 열심히 흡수하던 나무들은 이제 동파 방지를 위해 물길을 닫았고 제 몸속에 지니고 있던 본색을 드러낸 뒤 제 가진 것을 하나둘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긴 월동을 준비한다.단풍 농사가 흉작인 숲에서도 은행나무가 있어 그나마 지리산의 가을 풍경을 남길 수 있음에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하지만 이 은행나무 단풍을 사진으로 남기기가 결코 쉬운 일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세 분의 초상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무릇 혁명에 있어 지도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분들은 어떻게 동학농민혁명 3대장군의 반열에 오르고 시공을 뛰어넘어 역사 속에 살아남게 되었을까?어찌 이분들 뿐이겠는가? 5대 장군, 10대 장군, 이름도 성도 없이 쓰러져간 무수한 농민군들을 그려본다. 스러져가는 한 시대와 더불어 기꺼이 사라짐으로 하여 새 시대를 열어젖힌 사람들, 자신의 흔적을 끊임없이 지워가며 온몸을 불살라 오히려 선명하게 역사에 각인된 혁명가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조를 잃지 않았기에 유해조차 수습
큰아이가 얼마 전 동아리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놀러 왔다. 친구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이들과 같은 종교동아리 출신의 선배이기도 한 내 이야기가 궁금했단다. 어디 가서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는 일은 모양이 빠져 눈치를 봐야 하는데, 입을 열라 하니 신나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주절댔다.내가 학생일 때는 구제금융 전후의 세기말이기도 해서 길거리로 뛰어나가 싸울 일이 많았었노라, 특히 농촌활동(농활)은 지금의 삶에도 깊게 영향을 주어 ‘농촌사회학’을 공부하기로 한 데에 중요한 계기였다 하니 동아리 활동이 진로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놀라
지리산에서 실상사가 갖는 의미는 아주 각별하다. 지리산 생명 평화 운동의 시작점이자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엄숙 진지함보다는 마을 가운데 자리하고는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웃 같은 절집으로 느껴지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지리산이 위태로울 땐 저항의 구심점이 되어 지리산의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역할을 자임해 온 것도 실상사였다.이 가을날, 지리산 운동의 심장 그 실상사가 지리산프로젝트란 이름을 달고 울타리 없는 미술관이 되었다. 그림, 사진, 설치미술 등등 다양한 모습으로 실상사 곳곳을 장식하면서
살아남은 농민군은 의병이 되었다.우금티 패전 이후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유림이 조직한 민보군에 맞서 삼천리강산을 피로 물들이며 죽어갔다. 이렇듯 광범위하게 자행된 살육전에서도 살아남은 농민군은 산적 혹은 화적떼로 변신하거나 흩어져 몸을 숨겨야 했다. 이런 그들이 항일의병 투쟁에 가담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림이 중심이 된 초기 의병 투쟁에서 농민군은 환영받지 못했다.“충성심을 품고 의리를 붙들려 하는 자는 몇몇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하여 농민이 천 명, 백 명씩 무리를 이루고는 의병이라 일컬었다.
참으로 힘들었던 여름은 그 꼬리를 감추고 언제나 단명인 가을이 서서히 지리산을 물들이고 있다. 이번 여름이 가장 덜 더운 여름으로 기록될 거라 했고 극한호우란 단어가 등장했던 올여름, 유난히 더웠고 또 비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쏟아부었던가. 그럼에도 지리산의 들녘엔 알곡들이 여물면서 단순한 식량 그 이상의 무게로 벼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초봄 모를 준비하고 논물 대면서 시작하는 벼농사, 식량은 기본이고 가장 생태적인 저수지에 청정 산소를 생산하는 초록 공장 역할을 하는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다. 게다가 봄부터 가을 그리
“칼노래라는 것은 우리 대신사 수운 선생께서 여기 전라도 남원 선국사 은적암에 머무르실 때 지으신 노래올시다. 여기 은적암에서 석 달을 머무르셨는데, 그 사이 도력이 더욱 왕성하시니, 그 희열을 금치 못하여 스스로 노래를 지으시어 달 밝고 바람 맑은 밤을 타서, 목검을 짚고 묘고봉상에 홀로 올라 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시니, 그 노래를 일러 검결 즉 칼노래라 하였습니다(녹두장군, 송기숙 저).”‘때가 왔네 때가 왔네 다시 못 올 때가 왔네. 만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대장부가 다시 못 올 때를 만났으니,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근 10여 년 농촌 교육을 한다며 강사로 들락댔다. 기초지자체마다 가용할 수 있는 교육비가 책정되고 농촌의 교육 대상과 범위도 넓어지는 추세다. 생활세계가 겹치는 면 단위 교육도 많아지고, 마을 단위 교육도 활발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만 교육의 질이 받쳐주는지는 냉정하게 들여다볼 일이다. 교육에 참가하는 주민들은 대체로 직책이라도 하나 맡고 있는 리더들이 많다. 보고용 사진도 잘 나와야 하고 강사 섭섭할까 싶어 공공근로를 나온 노인들이 자리를 채우기도 한다.교육 내용은 중요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영농교육이나 직불금 관련 교육
지난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경남 산청에서 ‘함께평화’가 준비한 함께평화영화제가 열렸고 필자는 부대행사로 ‘지리산을 그대로’라는 이름으로 사진전을 진행했다. 행사의 일환으로 작품 판매 수익금은 전액 함께평화에 후원을 했다.‘함께평화’는 산청 주민들 스스로 모금을 통해서 3년 전인 2020년 8월 14일 산청읍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고 그 평화의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는 주민들의 자발적 모임으로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영화제를 개최했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행사의 일환이었다.이번 전시회는 개인적으로 세 번째 ‘지리산을 그대
전주화약 이후 2차 봉기에 이르는 시기, 조선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일파의 요청에 따른 청의 파병 결정은 일본군 상륙의 구실이 되었다.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자마자 한양으로 올라가더니, 급기야 경복궁을 침범하여 민씨 일파를 몰아내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출범시켰다.임오년 청나라에 납치된 이래 12년 만에 대원군이 정계에 복귀했다. 일본은 자신의 침략행위와 내정간섭의 방패막이로, 대원군은 고종과 민비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세워보겠다는 속셈이 있었다.대원군은 평양에 주둔한 청군과
지리산엔 아흔아홉골이 있다고 하듯이 수많은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따라 골골의 물이 모이고 또 모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은 바다로 바다로 흘러간다. 계곡을 끼고 걷는 길들은 숲의 기운과 함께 물이 흐르면서 발생하는 음이온까지 더해져 더 쾌적한 발걸음이 된다. 무더운 여름철에 부담 없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지리산의 계곡길들을 소개한다.남원 구룡계곡길남원 8경 중 제1경인 구룡폭포를 만날 수 있는 구룡계곡길은 지리산국립공원 전북사무소가 있는 주천면 호경리 육모정에서 덕치리 구룡계곡까지 펼쳐지는 심산유곡으로 길이가 약 3㎞ 정도다.
영호대접주 김인배, 그이는 금구(현 전북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 사람이다.갑오년 무렵 금구현은 혁명의 본거지였다. 1893년에 있은 원평(금구현) 집회는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을 ‘척왜양’을 기치로 한 사회변혁 운동으로 고조시킨 강력한 거점이 됐으며, 9월 2차 봉기 당시 원평은 농민군의 가장 든든한 후방 기지가 됐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지도자들이 원평을 주 무대로 얼기설기 동지적 관계를 맺고 혁명의 큰 그림을 그려나갔으니 김덕명, 김개남, 전봉준, 최경선 등이 그들이다. 김인배 또한 이들과 더불어 성장했다.김인배가 역사에 처음 등장
연초에는 미루던 큰 숙제를 하나 끝마쳤다. 구순에 접어든 둘째, 셋째 이모부들을 생전에 찾아뵙는 일이었다. 농촌사회학 연구자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농민들인 친척 어른들 안부조차 챙기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있었다. 생존해 계시는 이모부와 숙모들이라도 돌아가시기 전에 직접 뵙고 손에 용돈이라도 드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방학 때마다 놀러 가서 보살핌을 받았고 엄마는 쌀이며 양념 등속을 얻어 우리를 길렀으므로 내 성장 과정에 이모부, 숙모들의 지분도 분명 있다.이모들은 평생 농사를 짓다 몸이 곯아 일찌감치 떠났다.
경남 하동 횡천에서 청학동 가는 길, 청암면에 있는 청암중학교 들머리에 커다란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큰 산 아래 큰 인물 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지리산 사람들에게 지리산이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지리산 아흔아홉골 그중에도 가장 명당자리에 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는 마을의 구심점이 되기도 했지만 인구 절벽의 시대를 증명하듯 숱한 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또 합쳐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그렇지만 여전히 학교는 지속 가능한 우리들의 미래를 보장해줄 첫 단추임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갑오년 5월 31일 농민군이 용머리고개를 넘어 전주성에 입성했다.“이때는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전주 서문 밖 장날이라, 때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쯤 되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고개에서 일성의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 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시장판을 뒤엎었다. 별안간 난포 소리에 놀란 장꾼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뒤죽박죽이 되어 헤어져 달아났다. 서문으로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같이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한편 고함을 지르며 한편 총질을 하였다. 서문에서 파수 보는 병정들은 어찌 된 까닭
해마다 오월 초순이면 한반도의 남쪽부터 꽃을 피우며 북상하는 철쭉은 이 땅의 봄이 깊어간다는 걸 알리는 파수꾼이다. 이즈음 지리산 자락 바래봉과 형제봉에서 철쭉제가 열린다. 하지만 필자는 철쭉이 활짝 필 무렵이면 뒷동산 마실 가듯이 황매산을 오른다.그것도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오른다. 철쭉을 배경으로 황매평원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노을에 물들어 가는 장쾌한 지리산 주 능선을 바라보는 그 감동은 말로써 형언하기 어렵다.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볼 때 더 아름다운 지리산임을 확인할 수 있다.철쭉의 어원은 한자
갑오년, 조선 농민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그들의 싸움은 조선 말기 ‘민란의 시대’ 100년을 결산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 새롭게 등장한 제국주의 침략세력과의 첫 대결이었다. 조선의 운명을 가르는 판갈이 싸움에서 농민군은 크게 패했고 그들의 패배는 조선의 패망으로 귀착되었다. 세기의 투쟁, 그들은 무엇을 남겼는가?누천년 역사의 뒤안길에서 감당해온 억압과 착취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농민들의 투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꼬박 1년을 싸웠으며 조선 봉건 지배체제에 돌이킬 수 없는 크나큰 균열과 충격을 안겨
한동안 K-TV에서 송출하는 보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국민학생 때 봤던 드라마여서 ‘일용엄니’의 인기는 기억하지만 내용의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알겠다. 농촌을 낭만화하고 가족주의 체제를 공고히 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농촌이 처한 현실도 비교적 잘 담아내고 있었다.그중에서도 양촌리 마을에 ‘응삼이’로 대표되는 농촌총각의 결혼 문제는 매회 관통하는 중심 스토리다. 1985년 방영된 ‘서울행편’에서 마을의 노총각들이 단체로 서울로 맞선을 보러 간다. 이때 서울내기 ‘보배엄마(희옥)’와 ‘기홍’의 맞선이 성사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