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농민운동가를 상상하라

  • 입력 2023.04.30 19:15
  • 수정 2023.04.30 19:19
  • 기자명 정은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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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 작가. 농촌사회학 연구자. '대한민국치킨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뿌리다 – 백남기 농민 투쟁 기록',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등을 썼다. 농촌과 먹거리, 자영업 문제를 주제로 일간지와 매체에 글을 쓰고 있으며 라디오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농촌과 음식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도 겸하고 있다.
정은정 작가. 농촌사회학 연구자. '대한민국치킨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뿌리다 – 백남기 농민 투쟁 기록',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등을 썼다. 농촌과 먹거리, 자영업 문제를 주제로 일간지와 매체에 글을 쓰고 있으며 라디오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농촌과 음식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도 겸하고 있다.

한동안 K-TV에서 송출하는 <전원일기> 보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 국민학생 때 봤던 드라마여서 ‘일용엄니’의 인기는 기억하지만 내용의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알겠다. 농촌을 낭만화하고 가족주의 체제를 공고히 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농촌이 처한 현실도 비교적 잘 담아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양촌리 마을에 ‘응삼이’로 대표되는 농촌총각의 결혼 문제는 매회 관통하는 중심 스토리다. 1985년 방영된 ‘서울행편’에서 마을의 노총각들이 단체로 서울로 맞선을 보러 간다. 이때 서울내기 ‘보배엄마(희옥)’와 ‘기홍’의 맞선이 성사돼 양촌리 트러블메이커이자 깍쟁이 ‘서울댁’이 탄생한다. 1980년대 농촌총각들의 비관 자살 문제가 언론을 장식했던 때였고,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는 사회적 관심사였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도 마찬가지로 1990년 ‘농촌총각결혼대책위’를 결성하기도 했다. <전원일기> ‘서울행편’에서 유일하게 결혼까지 이른 ‘기홍’은 동네에서 제일가는 부농으로 나온다. ‘보배네’는 전축이나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을 턱턱 들여놓거나 비싼 화장품을 사서 자랑을 일삼으니 동네 여성들의 질투를 받는 캐릭터였고 이 때문에 마을에 종종 분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1980~90년대 농촌은 이미 떠날 사람은 떠났고, 남아서 농업을 이어가던 젊은 농민들(농촌총각)의 결혼 문제는 ‘보배엄마’가 아닌 결혼이주여성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지금의 농업은 고령의 농민들과 이주노동자들이 떠받치고 있다. 농업 인력난을 절감하며 이주민 문제를 먼저 겪어본 농업계가 이주민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농촌을 상상하고 제안해야 한다. 2020년 10월 전남 영암군 시종면 신연리의 고구마밭에서 수십여 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고구마를 캐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금의 농업은 고령의 농민들과 이주노동자들이 떠받치고 있다. 농업 인력난을 절감하며 이주민 문제를 먼저 겪어본 농업계가 이주민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농촌을 상상하고 제안해야 한다. 2020년 10월 전남 영암군 시종면 신연리의 고구마밭에서 수십여 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고구마를 캐고 있다. 한승호 기자

한국 국제결혼 역사, 농촌에서 시작

때마침 한 관변단체에서 주최한 1990년 ‘영농후계자 해외교포 합동결혼식’ 사진을 보았다. 미혼의 남성 농민들과 ‘조선족’이라 불렀던 중국동포 여성들의 합동결혼식 사진이었다. 엇비슷한 드레스와 신부화장,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이 생긴 웨딩부케를 들고 있는 신부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같은 동포라지만 사람도(심지어 신랑마저도) 설고, 물도 설은 나라에 와서 치러야 하는 합동결혼식에서 웃을 수 있는 신부가 과연 있었을까. 아마 이날 결혼식을 올린 부부에게 자녀가 있다면 지금쯤 삼십 대 언저리의 청년들일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농촌에서 지자체 차원에서 국제결혼중개업체를 끼고 단체 맞선을 보러 가는 일이 많았고, ‘매매혼’이라는 비판도 매서웠다. 어찌 됐든 이때는 반짝 농촌에 혼인신고도, 출생신고도 있던 시기였다. 1990년대까지 중국동포와 중국 출신 여성들과의 혼인이 많았다가 이후 필리핀,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러시아, 북한 이탈 주민까지 다양한 국적과 이주 배경을 가진 여성들이 이주를 해왔다. 지금은 베트남에서의 결혼 이주가 가장 많아 베트남을 ‘사돈의 나라’로까지 부른다.

하지만 한때 ‘어리고 예쁜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도망가지 않는 필리핀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경악스러운 현수막이 버젓이 나부낄 때가 있었고 이는 사회적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때 다양한 결혼이주문제와 다문화가족에 대한 연구도 나왔다. 여성가족부 중심으로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족에 대한 조사연구와 정책들도 속속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농촌에서의 국제결혼은 고령화 추세에 따라 혼인건수 자체가 거의 없어서 농촌 지역의 다문화가족 정책에 대한 관심은 예전만큼 높지 않다.

한국 국제결혼의 역사는 농촌에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주로 도시권에서 이루어진다. 2000년 당시 국제결혼 건수가 1만1,605건이었는데 2005년에는 4만2,356건에 이를 정도로 국제결혼 전성시대였다. 한동안 3만 건 내외로 꾸준히 오르락내리락하다 2020년대에 들어서 1만 건 내외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혼인건수가 줄어든 영향도 크다.

2000년대 중후반까지 활발했던 국제결혼 덕분에 다문화 2세 베이비붐 시대가 열렸다. 앞서 말했듯 1990년대 초중반에 태어났다면 지금 30대 전후이고, 2000년대 초중반에 태어났다면 성인기에 접어들었다. 여성가족부의 예측치로 2023년에는 성인기에 접어드는 다문화 2세들이 7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한다. 추정치인 이유는 결혼이주여성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2세들 다수가 한국에서 태어났기에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한국인이기 때문이고 정책의 대상자로 다문화 배경의 청년들 문제가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교육통계에서는 다문화 배경의 어린이와 청소년 통계를 따로 내고 그에 맞는 교육 정책을 수립하는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만 19세에서 34세까지 성인에 진입한 다문화 배경의 청년들을 따로 떼서 들여다본 연구는 매우 부족하다. 여기에 농촌 지역을 따로 떼서 수행한 연구도 드물다. 이는 다문화 배경의 2세들 60% 이상이 도시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농촌이 도시보다 인구대비수 다문화가정 청소년의 비율은 높다. 학생들이 없어 농촌 학교가 문을 닫을 위기라 학령기의 어린이, 청소년들 자체가 많이 줄었지만 농촌에서 다문화 배경의 학생들 비율이 높단 뜻이다. 나도 종종 농촌 학교에 강의를 가면 이국의 얼굴을 한 학생들을 종종 마주한다.

지난 3일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의 한 무밭에서 농민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무를 수확해 상자에 담고 있다. 드론을 띄워 하늘에서 본 무밭은 무청의 초록빛과 갓 뽑아 올린 무의 하얀 색이 어울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지난 1월 3일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의 한 무밭에서 농민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이 무를 수확해 상자에 담고 있다. 한승호 기자

마을에 정착한 다문화 2세 청년 드물어

정작 이상한 것은 전국 농촌을 돌아다녀 보면서 마을에 정착한 다문화 배경 청년들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30대 전후면 결혼적령기로 이제 다문화 배경의 3세가 등장할 때이지만 일천한 내 경험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여기저기 물어보아도 부모의 농사를 이어받은 다문화 배경의 승계농 사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로 인근 도시의 산업단지나 수도권으로 가서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진출해 농업 외의 직업을 갖고 있었다.

2019년 윤형준의 논문 <다문화 2세대의 성인 초기 발달과업 수행에 대한 지원정책의 발전방향>을 보면 다문화 배경의 청년들은 서비스종사자가 25.7%, 단순노무종사자가 19.7%를 차지하고 비숙련, 저임금 노동에 종사 중이었다. 개중 ‘플랫폼노동’이라 하여 배달이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언어와 문화적 차이, 학력과 기술 습득의 한계 등으로 전문적인 직종이나 관리직으로는 나아가기가 힘든 상황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중에서도 농림어업 종사자 비율은 어떻게 통계가 잡혔을까 싶을 정도로 미미한 0.2% 내외로, 2023년 현실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처음부터 물려줄 농사가 없어서다. ‘보배아빠’ 기홍이네처럼 큰농사를 짓지도 않고, 대다수 임차농이거나 한계농 처지다. 설사 물려줄 농사가 있다손 쳐도 농업이 물려줄 만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소득은 미미하거나 빚을 지기 일쑤이니 아무리 저임금이어도 통장에 매달 돈이 꽂히는 일자리를 얻으라 떠민다. 결혼이주여성(어머니)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농촌에서 살더라도 자녀들은 농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갖길 바라고 있었다. 이는 보통의 한국 어머니들과 같다. 아이들 학원 보내고, 고등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투잡, 쓰리잡까지 뛰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다문화연구에서 교차 검증된 몇 가지 뼈아픈 결론이 있다. 다문화 배경 2세들의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와 가족의 지지다. 하지만 아버지 쪽의 지지가 특히 취약했다. 결혼이주여성들의 경우 정착 초기, 낯선 언어와 문화로 적응에 대한 어려움이 큰 데다 체계적인 한국말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경제적 압박으로 저임금 단순노동에라도 진출해 소득을 보존하느라 언어가 충분히 영글지 못하기도 한다. 부족한 한국어 실력 때문에 자녀들의 학습보조나 지원을 충분히 하지 못했지만 이 공백을 한국인 아버지도 메우지 못했던 것이다.

경제적 지원을 떠나서 정서적 지지도 약했다. 국제결혼을 한 부모의 연령차가 커서 부모들끼리의 세대 차이와 가족 간 갈등도 많았다. 최근 연구에서는 한국인 아버지 입장에서 ‘늦게 얻은 자식’들인 다문화 배경 2세들의 아버지가 노년에 접어들기 시작해 돌봄의 대상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충분히 지원을 받으면서 미래를 준비할 여력이 없어 비숙련 저임금 노동시장에 들어가 미래를 도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국제결혼이 이루어진 농촌의 다문화가족이 충분한 사회적 지원과 지지를 받고, 그 2세들은 농업에 대한 전망을 품고 농사를 이어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최소한 자신이 태어난 농촌을 떠나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살았더라면 지금의 농촌이 조금은 다복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덧없는 상상도 해본다. 농촌에서 나고 자란 다문화 배경의 청년들이 도시로 나가 윤택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노동에 배치되었다면 이는 ‘외국인이주노동자화’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지난 17일 경기도 여주시청 앞에서 열린 '외국인 농업노동자 단속 중단 및 농업인력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여주지역 농민들이 본격적인 농번기를 앞두고 이뤄진 미등록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단속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달 17일 경기도 여주시청 앞에서 열린 '외국인 농업노동자 단속 중단 및 농업인력에 대한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여주지역 농민들이 본격적인 농번기를 앞두고 이뤄진 미등록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단속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이주민이 떠받치는 농촌, 함께 평화롭게

지금의 농업은 기력 달리는 고령의 농민들과 이주노동자들이 떠받친다. 결혼이주와 이주노동 문제를 같은 선상에 놓고 보는 일은 여러 논쟁을 거쳐야 하겠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미 30년 전에 농촌은 동북아의 이주민들과 어울렁더울렁 살아갈 기회를 가장 먼저 맞이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수입개방과 신자유주의 농정으로 상황이 몰려 당장의 문제와 부딪치느라 헉헉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촌의 국제결혼이 많았던 구조적인 이유가 농업의 신자유주의 체제의 결과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농촌의 결혼이주 문제와 다문화가족 문제는 보론이 아니라 중심의제로 밀고 나왔어야 했다. 진보적 농민운동 진영에서조차 농촌의 재생산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바빴고 피곤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인권침해를 당하는 피해자였으므로 타인의 인권보장 문제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다는 변명도 있다.

하지만 계급과 성, 인종 모두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구호는 농촌 앞에서 멈추곤 했다. ‘원래 보수적인 농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남의 가정사’라는 자포자기의 말에 모든 가능성을 덮어버린 결과를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얼마 전 농촌지역에서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단속이 있었다. 불법을 만연시켜 놓은 정부는 법만 앞세워서 이주노동자들을 잡아가고 이들을 고용한 농민은 불법을 자행한 고용주가 되어 거액의 벌금을 물게 된 억울한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이 없으면 농사가 굴러가지 않건만 국가는 알면서도(과연 알까?) 여론의 반전을 꾀하며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을 잡아 가두거나 추방하려 한다. 이런 행태는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반복된 일이다.

여기에 인권운동 진영에서 농업이주노동자에 대한 반인권적 행태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몇몇 지역이 집중적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소통의 가능성은 좀 더 줄어든 느낌이다. 근래 농촌 현장에서 아예 이주노동자의 ‘이’자도, 인권의 ‘인’ 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다. 소수의 악덕 사례로 모든 농민들을 악랄한 노예 농장주로 몰아세웠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정작 이 사태의 책임자인 국가는 뒷짐 지고 있는데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동료들끼리 반목을 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그러나 갈등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농업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 문제에 대한 첨예한 토론이 오갈수록 이 문제는 중요한 의제로 떠오를 것이다. 당장 듣기에 불편한 말이어도 이주민 문제를 먼저 겪어본 농업계가 아픈 상처의 고름도 터뜨리고 이주민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농촌을 상상하고 제안해야 한다. 10년 뒤 이주노동자 출신의 농민운동가와 다문화 배경의 농민운동가가 농민대회 단상에 올라 멋지게 구호를 외칠 날을 당장 꿈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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