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의 긴 장마에 잦은 가을비까지 더해져 올해 지리산의 단풍 농사는 영 시원찮다. 단풍나무류의 단풍은 그 어느 해보다 우중충한 민낯으로 가을을 맞았다.
광합성에 최적화된 초록잎으로 화장을 하고는 햇빛을 열심히 흡수하던 나무들은 이제 동파 방지를 위해 물길을 닫았고 제 몸속에 지니고 있던 본색을 드러낸 뒤 제 가진 것을 하나둘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긴 월동을 준비한다.
단풍 농사가 흉작인 숲에서도 은행나무가 있어 그나마 지리산의 가을 풍경을 남길 수 있음에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하지만 이 은행나무 단풍을 사진으로 남기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은행잎들이 노랑으로 물드는 시기가 해마다 다르고 또 어떤 때에는 밤새 불어닥친 강풍에 그 노랗던 잎들이 깡그리 떨어져 허탈해하던 적도 있었다. 사랑이 그렇듯 은행나무 단풍 사진 찍기도 타이밍이 좌우한다는 사실,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듯싶다.
올가을 노란 단풍이 절정일 때 제대로 알현한 하동 옥종 청룡리 은행나무 어르신의 풍채는 여전하셨다. 산청 산천재 앞 도로에서 만난 은행나무 가로수는 동네 할머니의 출연으로 그 색감이 진하게 담겼다. 은행나무가 살아 있는 화석 나무로 불리듯 노란 가을 단풍으로도 그 긴 전통을 이어오고 있고 또 이어가리라.
은행나무 말고도 이 가을의 끝자락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만난 가을의 본색들을 떠올려 본다. 은행나무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메타세쿼이어의 단풍 색감 또한 찬란하단 표현이 절로 나오는데, 수면에 데칼코마니로 투영되는 한 폭의 수채화를 둘레길이 지나는 산청 내리저수지에서 감상할 수가 있다.
그리고 노고단 가는 길에서 만나는 파스텔톤의 붉은 단풍들을 보면서 바람을 견뎌내는 키 작은 나무들의 지혜를 느낄 수가 있었다.
지리산의 가을빛은 숲에서만 깊어가는 건 아니다. 지리산의 중요한 구성체인 지리산의 강들 또한 가을빛 강물로 유장하게 흐른다. 며칠 전 노을이 질 무렵 성철스님순례길을 걸으며 경호강과 양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에서도 노을이 더해져 가을빛이 물씬 묻어있는 강 풍경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실상사 공양간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들은 또 다른 가을 색감으로 다가왔다. 이렇듯 떠나는 가을의 흔적이 지리산 도처에 스며 있음을 보면서 언제나 단명인 그 가을의 본색을 필자의 졸시로 남긴다.
가을 본색
최세현
초록으로 속마음 숨겨오던 숲
그 숲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단풍의 남하 속도 하루 25㎞ 그 속도로…
하지만 알록달록 그 본색을 다 보여주기엔
너무도 단명인 가을이다
일제히 불타올라 장렬히 소신공양하고 나면
온 숲은 바람으로 뒤척거릴 것이다
사람들아,
부디 경배의 절을 올리시라
이 눈부신 가을날에 제 할 일 다 마치곤
각양각색의 본색을 드러내는 저 숲을 향해서…
지리산 자락으로 귀농해서 22년째 유정란 농사를 짓고 있는 최세현 지리산초록걸음 대표의 지리산 자락 사진이야기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