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보느니 밭을 맨다?’ 농촌의 돌봄문제, 우리의 미래다

  • 입력 2023.07.02 18:00
  • 수정 2023.07.02 21:01
  • 기자명 정은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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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 작가. 농촌사회학 연구자. '대한민국치킨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뿌리다 – 백남기 농민 투쟁 기록',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등을 썼다. 농촌과 먹거리, 자영업 문제를 주제로 일간지와 매체에 글을 쓰고 있으며 라디오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농촌과 음식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도 겸하고 있다.
정은정 작가. 농촌사회학 연구자. '대한민국치킨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뿌리다 – 백남기 농민 투쟁 기록',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등을 썼다. 농촌과 먹거리, 자영업 문제를 주제로 일간지와 매체에 글을 쓰고 있으며 라디오와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농촌과 음식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도 겸하고 있다.

연초에는 미루던 큰 숙제를 하나 끝마쳤다. 구순에 접어든 둘째, 셋째 이모부들을 생전에 찾아뵙는 일이었다. 농촌사회학 연구자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농민들인 친척 어른들 안부조차 챙기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 있었다. 생존해 계시는 이모부와 숙모들이라도 돌아가시기 전에 직접 뵙고 손에 용돈이라도 드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방학 때마다 놀러 가서 보살핌을 받았고 엄마는 쌀이며 양념 등속을 얻어 우리를 길렀으므로 내 성장 과정에 이모부, 숙모들의 지분도 분명 있다.

이모들은 평생 농사를 짓다 몸이 곯아 일찌감치 떠났다. 초로에 혼자되신 이모부들은 농촌의 ‘남성 독거노인’으로 지내다 이제 거동도, 의사소통도 어려워졌다. 진즉에 찾아뵐 걸, 후회스러웠다. 게다가 셋째 이모부는 치매 증상도 있어 조카도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칠순이 다 되어가는 사촌 언니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이모부를 돌보고 있다.

언니들은 그 시절 농촌에서 장녀로 태어난 숙명을 고스란히 떠안은 이들이다. 어린 나이에 일을 나간 이모들을 대신해 어린 동생들(내겐 사촌오빠들) 포대기로 업느라 뼈가 주저앉아 키도 작다. 언니들은 양보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양보에는 남동생들에게 내준 ‘닭다리’도 있었으며, 엄마를 도울 이른 새벽잠도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좀 더 진취적으로 만들 원천기회인 학력을 양보하고 말았다. 중학교만 겨우 마치고 서울로 나와 봉제공장 시다로 일을 하며 서울로 공부하러 나온 동생 밥을 해주며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다 비슷한 형편의 남자를 만나 결혼해, 시어른들에게 매어 살다 이제 늙은 친정 부모의 돌봄을 맡았다.

언니들은 ‘나 하나 힘들면 모두 편하다’라는 말로 지금의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본인들도 허리와 관절이 좋지 않아 보호대를 차고 손목 발목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으면서 말이다. 아마 이런 사연은 라디오나 신문에 수기로 쓰면 너무 통속적이어서 뽑히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빤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어디 내 사촌 언니들 뿐일까. 현재 한국에서 치매 노인을 돌보는 돌봄제공자 10명 중 8명이 딸, 며느리 등 여성이고 그중 딸이 많다.

남성 노인이 아플 때 배우자인 여성 노인은 기꺼이 돌봄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여성 노인이 먼저 아프면 배우자인 남성 노인은 자신의 아내를 돌보지 못하고 자신조차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그래서 어머니는 시설이나 병원으로 옮기고도, 홀로 남은 아버지의 돌봄 문제로 그 가족들은 고심에 빠지곤 한다. 농촌에서 할머니들이 흔히 하는 말씀으로는 영감님이 자기보다 앞서 돌아가시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들마저도 자신이 할머니보다는 일찍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지만 그 순서가 꼬이면 현실에서의 돌봄은 덩달아 꼬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보느니 밭을 맨다’는 말이 있다. ‘아이’ 자리에 ‘노인’을 집어넣으면 딱 떨어질 상황이다. 밭에 나가 감자라도 캐서 팔면 가치 있는 일이 되지만 티도 나지 않고 신역만 된 돌봄의 상황을 드러내는 말이다. 돌봄시대를 맞아 지금의 농민운동이 ‘돌봄’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토론하여 의제화할 수 있어야 한다. 충남 아산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는 노인들이 로비에 모여 함께 TV를 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아이를 보느니 밭을 맨다’는 말이 있다. ‘아이’ 자리에 ‘노인’을 집어넣으면 딱 떨어질 상황이다. 밭에 나가 감자라도 캐서 팔면 가치 있는 일이 되지만 티도 나지 않고 신역만 된 돌봄의 상황을 드러내는 말이다. 돌봄시대를 맞아 지금의 농민운동이 ‘돌봄’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토론하여 의제화할 수 있어야 한다. 충남 아산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는 노인들이 로비에 모여 함께 TV를 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시대, 농촌은 더 열악

사촌언니들도 노년으로 접어든 시기에 그보다 더 연로한 남성 노인을 돌보는 일이 너무 벅차 보였다. 그래서 방문요양서비스를 이용해 언니들도 그 틈에 스스로 돌볼 시간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했다. 하지만 언니들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 깊숙한 산골까지 요양보호사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업체 입장에서는 서비스 이용자가 많을수록, 서비스 제공자와 이용자의 거리가 가까워야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농촌은 매우 취약하다. 2021년 기준으로 면 지역에 노인복지시설은 0.5개소, 동 지역은 평균 1.7개다. 게다가 농촌, 도시 가릴 것 없이 대다수 요양서비스 회사들이 적자 상태로 운영상태가 좋지 않다.

2021년에 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농촌 주민의 노인 돌봄 제공 의향과 수용의사금액 분석>을 보면 전체 재가노인복지시설의 23.3%가 적자 상태로, 면 지역 시설은 25.6%가 적자 상태이며, 읍 지역 20.8%보다 4.8%포인트 높다고 나온다. 그러니 농촌일수록 돌봄 서비스의 질을 따질 계제도 아니고 공급이라도 원활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면 지역 노인 인구는 2020년 11월 기준 146만명, 이 중 27.3%인 40만명이 돌봄이 필요하지만 노인장기요양보험이나 노인맞춤돌봄서비스 등을 받는 중증 돌봄 대상자는 22만명 수준으로 18만명이 붕 떠 있다. 고령의 노인들이 다수고 이를 돌볼 이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농어촌일수록 돌봄은 시급하고 절실한데 오히려 돌봄 제공자는 모자라 그 틈새를 가족, 그중에서도 여성이 겨우 틀어막거나 평생 살았던 지역을 떠나 낯선 곳의 요양시설로 옮겨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셋째 이모부는 상황이 더 좋지 않다. 이모부가 치매가 심해지면서 종종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토록 점잖던 양반이 어떻게 저런 험한 언사와 행동을 하는지 모를 일이고 언니는 자기의 허물인 양 부끄러워했다. 본인의 건강도 좋지 않은 언니는 쇠꼬챙이처럼 말라 있었다. 시설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는 내 말은 젠체하는 말이었을 뿐, 지금 이모부를 감당할 만한 요양시설이 없다 말했다. 최소 장기요양 1~2등급은 받아야 하는데 지금의 등급으로는 시설 이용이 어려운데다 폭력적 행동까지 보여서 어렵다는 것이다. 치매 행동으로 재가급여를 이용할 수 없더라도 등급판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 기회가 이모부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결국 이모부의 치매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한 노력보다는 좀 더 빨리, 확실히(!) 나빠져 시설로 모실 수 있는 상황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들도 노인인 상황에서 요양보호 가족케어 급여를 받기 위해 침침한 눈을 비비며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야만 했다. 어릴 때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나이 들어 억지로 하게 된 셈이다. 실제로 국내에 등록된 요양보호사 10명 중 4명이 딸로 나와 있으니 많은 딸들이 요양보호사가 되어 있다.

전남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에서 살고 있는 김창순(가명) 할머니가 지난 18일 안방에서 현관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전남 담양군 대덕면 운산리에서 홀로 살고 있는 김창순(가명) 할머니가  안방에서 현관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승호 기자

돌봄 대란 겪는 농촌, 한국사회의 미래

농촌은 한국 사회가 겪어야 할 모든 일들을 먼저 겪고 있을 뿐이며 농촌은 사회의 미래다. 2020년 기준으로 농촌의 고령화 비율은 23%로 농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4명 중 1명이 노인이다. 하지만 농촌이 먼저 겪을 뿐 도시도 그렇고 나라 전체로 보자면 아이들은 덜 태어나고 노인들은 많아질 것이며 돌봄에 대한 수요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현재 농촌의 노인들의 1인 독거 상황은 사별에 기인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이 사회는 1인 가구가 보편적인 가구형태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가족들, 그중에서도 아내와 딸들이 이 돌봄을 그나마 떠받치고 있지만 향후 가족관계에 기반한 돌봄은 기대하기 어렵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농어촌노인인권실태조사>에서 보면 농어촌의 노인들은 노후에 건강상 돌봄의 책임 주체에 대한 질문에 자신이라고 답한 사람이 541명(37.1%)이고 다음으로 가족 533명(36.6%), 국가 327명(22.4%)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조사하면 가족의 비율은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같은 보고서에서도 농촌의 노인들은 자신들의 건강 상태가 나빠지거나 거동이 불편해져서 주위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의료 서비스의 경우 국가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5점 만점에 4.12를 기록했다. 이는 외려 도시의 노인들보다 농어촌의 노인들이 국가의 책임을 더 높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제 가족을 넘어선 돌봄에 대한 요구가 농촌에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지금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촌 언니들도 자신의 돌봄을 자식들에게 맡길 의사가 전혀 없다. 자신들은 ‘오래 살고 싶지 않다’며 현실의 곤곤함과 미래의 불안함도 숨기지 못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이모부들마저 내 손을 잡고 “딸이 최고여!”라는 말로 지금의 미안한 상황을 본능적으로 눙치고 싶어 했다. 딸들이 최고인 시대가 이렇게 ‘돌봄’이라는 문제와 정면충돌하면서 억지스럽게 발견되고 발명된 셈이다.

돌봄문제, 농민운동 의제로 적극 다뤄야

누구나 늙고 아프면 돌봄이 필요하고 상호의존해야 한다. 꼭 늙어서만이 아니라 아기일 때는 물론이고 성인이 되어서도 매 순간 돌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코로나19로 방에 꼬박 열흘 넘게 갇혀 있어 보니 살림은 엉망이 되고 생활세계는 멈춰 버려 중년 여성인 내게도 돌봄과 지지가 필요했다. 꼭 병석에 누워서만이 아니라 먹고 치우고 그 모든 생활의 영역이 돌봄이자 사람의 삶을 굴러가게 만드는 핵심축이지만, 그동안 이 돌봄은 아내와 딸, 며느리들이 떠맡다시피 한 ‘여자의 일’이었고, 당연한 일이자 무가치한 일로 취급해 왔다. 그리고 그 후과를 지금 치르고 있다.

‘아이를 보느니 밭을 맨다’는 말이 있다. ‘아이’ 자리에 ‘노인’을 집어넣으면 딱 떨어질 상황이다. 밭에 나가 감자라도 캐서 팔면 가치 있는 일이 되지만 티도 나지 않고 신역만 된 돌봄의 상황을 드러내는 말이다. 돌봄 의존자가 많은 농촌에서 가장 먼저 돌봄 대란을 겪고 있는 데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한몫하지만 이런 사회문화적 문제도 상존한다.

돌봄 제공자는 마을에 한두 명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녀회 회원들이나 마을에 칠순 즈음의 젊은 여성들은 국을 한솥 끓여 옆집, 앞집, 뒷집 어른들까지 챙긴다. 하지만 이런 미풍양속(?)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그래서 선의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일정 정도 화폐로 보상하는 체계를 구축하자는 제안까지 나오고 있다. 중증 상태의 농촌의 돌봄 의존자(주로 노인)는 면 중심지 시설에서 돌봄을 제공하고, 마을의 돌봄 의존자들에게 주민은 생활돌봄과 같은 간단한 일상생활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단위 돌봄체계를 구성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이미 동네에서 음으로 양으로 이루어지는 돌봄을 아예 제도화하자는 뜻이지만, 지금처럼 어쩔 수 없이, 죽지 못해 사는 ‘요보호’ 상태가 될 때 작동하는 돌봄이라면 그저 삶의 외주화, 떠넘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돌봄의 가치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가치를 고양시키는 과정이 반드시 따라와야만 한다는 지적에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김영옥, 류은숙의 저서 <돌봄과 인권>에서는 인간은 본래 취약하고 상호의존해야 하며, 돌봄이 구차하고 버거운 것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이자 인권의 틀로 적극 해석하고 실행하자고 제안한다. 이 제안은 이미 취약하고 상호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농촌 구성원들이 먼저 골몰할 이야기다. 마을살이에 대한 감각이 그나마 살아있는 농촌이 서로 돌봄의 시대를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환영하는 자세로 나아갈 수 있다면 농촌은 돌봄의 미래상이 될 것이다.

돌봄시대를 맞아 지금의 농민운동이 ‘돌봄’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토론하여 의제화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늙은 누이들과 아내의 등골을 뽑아 삶의 구멍을 메울 것인지를 묻고 따져, 혁신해 나가야만 ‘너 살리고 나 살리는’ 동시에 우리 부모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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