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뭄에 농사일이 일찍 마무리되었습니다. 또 한 번의 가을을 어찌 맞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어찌어찌 가을이 넘어갑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봄가을 농번기가 훨씬 정신이 없었는데, 작년 다르고 올해는 또 다르게 느껴집니다. 어느새 집 앞으로 경운기가 3단 기어를 넣고 전속으로 달리던 풍경이 사라지고, 마을 분들의 나이와 반비례해서 농기계들의 속도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당연히 농사일도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또 자주 보이던 분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안부를 여쭈면 낙상사고가 일어났다거나 가벼운 시술을 하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
첫서리를 앞두고 수수밭을 정리하면서 늦게 열린 풋호박들이 주렁주렁 많아서 깜짝 놀랐다. 너희들은 왜 인제 열리고 있는 거니? 초가을에 여름처럼 뜨거웠던 날씨의 영향인 듯했다. 흰동부의 꼬투리도 예년보다 때늦게 여물고 있어서 소출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아마 올해 지독했던 봄 가뭄과 길었던 장마에 넝쿨만 길게 자란 탓인가 싶었다.자연에 대한 감각은 수년간 농부가 길어 올린 삶의 지혜일진대 이제는 소용이 없어지고 있다. 매년 조금씩 커지는 날씨 변화 폭에 24절기를 따르는 농사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풋호박을 비
태풍 힌남노를 맞고 드러누웠던 대파가 아직도 일어나는 중이다. 파밤나방 벌레와 굴파리가 대파 잎을 극성스럽게 뜯어먹고 있어서 너덜너덜했다. 농약을 하는 김에 배추밭까지 하려고 일꾼 한 명을 불렀다. 인력소개소에서 김혁씨가 왔다. 남편은 앞에서 농약을 뿌리고 김혁씨와 나는 농약줄을 잡아당겼다. 농약줄을 끌어주는 김혁씨가 바쁘게 뛰어다녔다. 밭가에서 농약줄을 끌어당기는 내가 힘을 덜 쓸 수 있도록 김혁씨는 최대한 멀리까지 끌고 갔다가 내 가까이 와서 끌어당겼다.“오빠! 그렇게 뛰어다니지 않아도 돼요.”남편과 둘이 하던 일을 셋이 하니
나는 우리 마을에서 윗말 사는 상을씨랑 순자, 도화, 순덕씨 그리고 아랫말로 가면서 찬규, 봉순씨랑 복순씨까지 이분들 외에도 성함은 잘 모르겠지만 오매가매 매일 보는 80대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간다. 내 나이 서른아홉이니 나는 아직도 그분들 인생의 반도 못 살아본 셈이다. 이제와 몇 년이나마 할매들과 나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상을씨와는 매주 일요일이면 잠깐이나마 드라이브를 하는데 다리가 아픈 상을씨가 멀리 못 다닐 것을 생각해 일부러 뒷말, 건너말로 돌고 돌아 오곤 한다. 그러면 누가 여든 넘었다 할까 싶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머
본격적인 가을농사철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진짜 바빠서 여우가 애를 업고 가도 모를 철이지만, 요새는 애가 없어서 뺏길 일도 없겠습니다. 어쨌건 이렇게 한 바쁨이 있기 전에 농가에서는 서로 간에, 지난여름에 수확한 깨나 고추가 남은 것이 있냐고들 연락을 하고는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난여름에는 가뭄과 폭염, 폭우 3종 세트가 겹쳐 기후위기란 이런 것이다, 라고 대놓고 경고를 하는 셈이었지요. 그러니 전국적으로 밭곡식이 흉작이었습니다. 어쩌다 잘 된 집도 있지만, 시쳇말로 그것은 재수가 좋았던 것이고 대부분은 평년에 못 미치는 형국이었
소농이 수확한 농작물을 내고 싶을 때 그 양이 어떻든 원하는 가격으로 쉽게 판매대에 올려 소비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거창푸드종합센터(거창푸드)이다. 나 역시 소량의 다양한 약초를 말려서 차로 끓여 마실 수 있도록 포장을 해서 내고 있다. 또한, 거창푸드는 농민이 단순히 생산자에서 나아가 식생활 수업, 토종씨앗 워크숍 등을 통해 지역 먹거리의 가치를 학생과 소비자에게 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은 얼굴 아는 농부의 먹거리를 구해 밥상을 차리니 지역 공동체 의식이 절로 샘솟는다.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
추석날 아침에 시어머니가 계신 광주에 가는데 해남 지역 곳곳에서 일꾼들이 거름을 뿌리기도 하고 비닐을 씌우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다급한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며칠 전의 태풍으로 땅이 마르지 않아 명절 지나고 차분히 시작하려던 일을 앞당겨서 처리하느라 성묘든 명절이든 뒷전이다. 며칠 만에 또 태풍이 생겨서 11일 오후부터 4일 동안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농사꾼들의 명절을 밀쳐냈다. 겨울배추를 미리 심지 않았다면 나도 저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숨 가쁘게 뛰어다니고 있으리라.9월 10~25일 즈음에 겨울배추를
저는 2017년부터 자발적 농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농촌에서의 삶은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말과 소리를 듣게 되는 신기한 일입니다. 특히 농촌사회는 마을에서 함께 살고 있는 구성원들의 노동과 노력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 어귀 길가의 풀들은 누가 깎는지, 어려운 이웃들은 누가 돌보는지, 곳곳에 쓰레기들은 누가 줍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와 보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때마다 자리마다 누군가의 손길들이 닿아 관리되고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자기 농사만 짓는
귀농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생산수단은 단연코 질 좋은 농지입니다. 농기계는 임대소에서 빌릴 수도 있고, 농기구는 정보만 알면 어디서든 구할 수가 있고, 씨앗이나 모종도 그런대로 구할 수 있지만, 농지를 구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도 그냥 농지가 아니라 우량농지 말입니다. 우량농지와 박토의 생산량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또 그 농사를 지을 때 남부러운 그 재미가 얼마인지, 현지에서 농사를 짓고 살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물론이거니와 박토를 옥토로 만드는 데는 평생의 노력이 들어갑니다. 용수공급도 좋아야 하고, 동시에 물 빠짐
말복이 지나 처서가 코앞이다. 호박 넝쿨이 밭을 뒤덮다 못해 자꾸 이웃 밭으로 번져나간다. 고운 목화꽃은 진분홍빛으로 피고 지다 목화 다래가 소담스럽게 열리고 있다. 추석 명절에다가 가을철 농번기가 다가오니 마음부터 분주한데, 다행히 여름 방학에 끝이 보인다. 농번기에는 농사일이 몰아쳐 바쁘다면, 농한기인 한여름과 겨울에는 아이들 방학이 곧 엄마에게 개학이라 쉴 틈이 없었다.요새 초등학교는 방학에도 돌봄교실을 운영하고 지역 돌봄센터에서도 프로그램을 진행하니 아이들이 온종일 집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들녘이 충만하다. 분얼을 마친 벼 포기에서는 좁쌀만 한 이삭이 만들어지고 있다. 무엇이라도 심을 수 있는 작은 땅뙈기마다 참깨가 꽃을 피워대면서 여물어가고 콩이며 들깨도 영역을 넓혀서 빈 땅을 채웠다.밭농사로 대파가 많은 이곳은 고추를 심은 농가를 제외하면 비교적 느슨한 시기이다. 가을농사, 겨울배추 파종하기 전 틈새인 셈이다.해마다 작목반에서 피서를 가는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각 가정의 온 식구가 다 모였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도 하고 씨름이나 사람 업고 달리기 시합 같은 경기를 하면서 오랜만에 많이 웃곤 했다. 올해는 다리 밑에
농산물 판매장을 열고, 택배를 취급하면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특히 여름철 옥수수와 농산물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말 그대로 눈코 뜰 새가 없어 그저 이 여름이 어서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그러던 중 내 마음이 울컥하는 일이 생겼다. 얼마 전 동네 체육공원 앞에서 어릴 적 알던 옆 마을 어른을 만났는데 순간 하시는 말씀이 “결혼하더니 아주 좋은가봐~ 몸이 편한가 본데”라고 말을 건넸다. 결혼식을 치른 4월부터 이미 ‘남편이 잘해주나봐~’부터 시작해서 ‘남편을 기쁘게 해주려면 좀 더 찌워야지’ 등의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