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나의 퍼머컬처 이야기

  • 입력 2022.10.23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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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첫서리를 앞두고 수수밭을 정리하면서 늦게 열린 풋호박들이 주렁주렁 많아서 깜짝 놀랐다. 너희들은 왜 인제 열리고 있는 거니? 초가을에 여름처럼 뜨거웠던 날씨의 영향인 듯했다. 흰동부의 꼬투리도 예년보다 때늦게 여물고 있어서 소출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아마 올해 지독했던 봄 가뭄과 길었던 장마에 넝쿨만 길게 자란 탓인가 싶었다.

자연에 대한 감각은 수년간 농부가 길어 올린 삶의 지혜일진대 이제는 소용이 없어지고 있다. 매년 조금씩 커지는 날씨 변화 폭에 24절기를 따르는 농사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풋호박을 비롯해 혼란을 겪는 식물의 생리적 변화에 농부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늦여름 강릉에서 열린 퍼머컬처 네트워크 출범식에 참석했다. 전국 곳곳에서 퍼머컬처를 시도하는 이들이 모였고, 그중 20여 팀이 활동한 내용을 공유했다. 거창에서는 ‘지구 온도를 낮추는 농부’ 모임에서 진행한 퍼머컬처 텃밭 교실 운영 사례를 발표했다. 둘러앉아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전하며 서로를 응원하는 기운을 나누니 가슴이 뭉클했다.

컨퍼런스를 마치고 한마음이 되어 선언했다. ‘퍼머컬처는 기존 인간 중심의 문명을 넘어 지구의 모든 생명, 미생물과도 연결되는 삶을 지향합니다. … 기후 위기 정점까지 6년, 우리는 퍼머컬처 윤리와 철학을 지키면서 지금 이 땅에서 퍼머컬처리스트로서 할 일을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행동하겠습니다.’ 마땅히 흙을 돌보아 미생물을 살리고 탄소를 저장하는 기후 농부가 되자고,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해야겠다고 힘을 얻은 자리였다.

기실 퍼머컬처(Permaculture)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십수 년 전의 일이다. 풀무학교 전공부 재학 중 퍼머컬처와 심층생태학 세미나를 함께 하자는 누군가의 제안을 덥썩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몇 번의 저녁 시간에 관련 원고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흐지부지 끝나버렸지만, 퍼머컬처란 철학이 꽤 익숙한 내용 같으면서도 퍼즐을 맞추듯 사고 체계가 새로이 정돈되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자연과 연결되는 내밀한 감성까지 건드렸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10년 후 금산에서 퍼머컬처 디자인 코스를 2주 일정으로 수료하게 되었다. 아마 두 아이를 키우며 처음으로, 가장 많이 집을 비운 날이었다. 텃밭 교사로서 농사 교육 프로그램을 다지기 위해, 또 우리가 사는 숲·농장·집 설계에 적용해보고자 어렵게 배움에 나선 길이었다.

여기서 퍼머컬처를 소개하자면 영속적인(Permanent)와 농업(Agriculture)을 조합한 신조어로 ‘지속 가능한 농업에 기초한 생태문화’를 의미한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순환농법에서 주로 영감을 받아 1970년대에 호주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135개국에 퍼머컬처 협회가 등록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전환 운동과 대안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상 우리네 이름 모를 수많은 선조에게 ‘퍼머컬처’란 낯선 개념이 따로 필요 없었다. 전통적으로 논 습지의 가치를 알고, 섞어짓기와 돌려짓기 등 24절기 자연 패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농사를 지어 왔다. 또한 시대를 불문하고 생태농,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은 이미 자연스럽게 지구와 전일적인 관계를 이루며 순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유효한 ‘퍼머컬처’란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에 경각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이자, 자연 시스템을 따라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는 윤리이기 때문이다. 기존과 다른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자원으로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숲밭을 만드는 일도 그렇다.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관계성을 고려하여 유기적으로 전체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사를 짓다가도 무시로 자연의 패턴과 에너지의 흐름, 그 상호작용을 관찰한다. 이러한 내적인 변화와 집단 규범의 변화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구조와 체제를 바꿀 힘이 생기는 전환 마을 운동으로 나아가기까지, 여성농민으로서 기후 위기와 혼돈을 정면으로 마주할 참이다. 설령 힘들다고 고립되지 않고, 꾸준하게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연결감을 강화하면서 말이다. 이토록 나에게 퍼머컬처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고자 생태적 지혜를 모색하는 또 하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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