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여성농민의 해방은 권리에서부터

  • 입력 2022.08.21 18:00
  • 기자명 박효정(경남 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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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정(경남 거창)
박효정(경남 거창)

말복이 지나 처서가 코앞이다. 호박 넝쿨이 밭을 뒤덮다 못해 자꾸 이웃 밭으로 번져나간다. 고운 목화꽃은 진분홍빛으로 피고 지다 목화 다래가 소담스럽게 열리고 있다. 추석 명절에다가 가을철 농번기가 다가오니 마음부터 분주한데, 다행히 여름 방학에 끝이 보인다. 농번기에는 농사일이 몰아쳐 바쁘다면, 농한기인 한여름과 겨울에는 아이들 방학이 곧 엄마에게 개학이라 쉴 틈이 없었다.

요새 초등학교는 방학에도 돌봄교실을 운영하고 지역 돌봄센터에서도 프로그램을 진행하니 아이들이 온종일 집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편이다. 따라서 밥상 차리는 일로 부엌일은 바빠지고, 집도 쉽게 어질러진다.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정리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천국일 거라고 투덜대며 자기 나름대로 정리를 했지만 집구석은 여전히 어수선한 편이다. 아이들이 깔끔한 공간에서 쾌적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은 내 욕심이다. 청소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쓸 수 없는 형편이기에, 가끔 청소를 몰아서 한다. 공들여 단정하게 정돈된 집 상태는 고작 몇 시간을 지속하지 못한다. 집 안 정리란 것은 웬만히 해서는 티도 안 나지만, 안 한 티는 확 나는 왠지 억울한 일이다. 사실 청소를 비롯한 집안일은 비단 엄마만의 문제가 아니라 식구들과 같이 해결할 문제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유명한 동화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을 보면 엄마가 없는 집안 꼴이 마치 돼지우리처럼 나온다. 집안일에 지친 엄마가 집을 떠나는 ‘돌봄 파업’을 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그린 책이다. 아마도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거나 상상해 보았을 것 같다. 결혼 파업, 임신 파업, 돌봄 파업은 현실이다. 이렇게 파업하는 까닭은 당사자의 권리가 침해당하여 일상이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한국농정>에서 출간한 <농민권리> 책 내용 중에 ‘여성농민의 권리’ 부분을 곱씹어 보고 있다. 여성농민이 모든 폭력으로부터 피해받지 않을 권리를 비롯하여 경제권, 정책 참여권, 건강권, 교육권, 정주권 등 기본적인 여성농민의 권리가 선언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꾸 들춰 보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껏 여성농민의 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해야 할 일을 수행하기 바빴으니 말이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니 끼니를 챙겨 먹고 잘 자고 본업을 수행하며 때로는 편안하게 쉬는 등의 마땅한 기본권조차 따지기 어려웠다. 하물며 여성농민의 권리를 신장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살피지 못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희생이란 ‘어떤 사물,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이라고 한다. 전래동화에는 어린 소녀나 여성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부장제 농촌에서 여성의 희생은 너무나 당연했고, 그 가치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인정하여 지위를 받은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엄마의 삶을 살게 해준 아이들을 돌보며 내 희생의 크기를 재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존재, 이미 죽음을 불사한 출산을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철 든 이후 내 엄마가 희생하는 것이 싫었다. 또한 모성이 내 덫이 되지 않길 바랐다. 당연히 내 딸들도 부디 모성에 갇히지 않길 바란다.

아는 언니는 아들을 낳았으니 시가에 해주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했다. 아들을 낳지 않으면 죄가 되던 시대가 옛말이 아닌, 그 언니가 사는 농촌의 삶에 여태껏 남아 있는 것이다. ‘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지!’ 딸을 놓고 많이 들었던 말이지만, 마냥 공감하기 어려웠다. 딸이라서 부모에게 감정적으로 더 배려하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들이 있어서 든든하지?’ 역시 잘 모르겠다. 아들이 가부장제에서 살기 편한 성별이라서 그런 말이 있는 건 아닐까. 딸들의 안전과 미래를 근심하는 부모가 많다. 가만히 있으면 권리를 누구도 대신 찾아주지 않는다. 만일 두 눈 부릅뜨고 여성농민의 권리를 찾는다면, 아들 딸 누구라도 어떨 것이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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