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우리 마을 사람들 - 80대 할매들 편

  • 입력 2022.10.09 18:00
  • 기자명 현윤정(강원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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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윤정(강원 홍천)
현윤정(강원 홍천)

나는 우리 마을에서 윗말 사는 상을씨랑 순자, 도화, 순덕씨 그리고 아랫말로 가면서 찬규, 봉순씨랑 복순씨까지 이분들 외에도 성함은 잘 모르겠지만 오매가매 매일 보는 80대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간다. 내 나이 서른아홉이니 나는 아직도 그분들 인생의 반도 못 살아본 셈이다. 이제와 몇 년이나마 할매들과 나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

상을씨와는 매주 일요일이면 잠깐이나마 드라이브를 하는데 다리가 아픈 상을씨가 멀리 못 다닐 것을 생각해 일부러 뒷말, 건너말로 돌고 돌아 오곤 한다. 그러면 누가 여든 넘었다 할까 싶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어머~ 여기가 이렇게 변했어. 원래 여기가 다 논밭이었는데, 산이었는데~’ 한다.

순자씨는 작년에 여든을 맞으시면서 읍내에 좀 태워달라 하셨다. 사발이 오토바이 운전을 계속하려면 인터넷으로 교통안전교육을 받고, 치매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러닝으로 들어가 회원가입을 하고 로그인을 한 뒤 수강신청을 하고 안전교육을 받은 다음 수료증을 발급받아 출력해서 경찰서에 내야 한다. 내 나이 서른아홉. 힘들었다. 사발이는 순자씨의 발이다. 안전을 위해 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라는데 그럼 집에서 고립되어야 하나?

도화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 김치냉장고 전원이 안 들어온다며, 음식이 다 녹고 쉬면 어떡하냐고 한번 봐줄 수 있냐 하셨다. 시간 되는대로 달려가 보니 나도 왜 그런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A/S센터에 전화를 했다. 거짓말 안 보태고 상담원 연결까지 17분이 걸렸다. 그리고 모델명을 알려달라고 했다. 모델명을 불러줄 아들, 딸들을 기다리기엔 냉장고 속 김치들이 걱정일 수밖에 없다. 다음날 기사님이 와서 고쳐주고 갔다. 일주일 후 도화씨는 또 놀라서 전화를 했다. 김치냉장고 화면이 또 안 들어온다고. 나는 또 놀라서 달려갔다. 자동 잠금 기능이었다. 요즘 가전제품들은 설정 완료 후 잠금 기능을 켜 두면 몇 초 후 화면이 꺼진다. 우리 도화씨는 불이 안 들어와서 혹여나 온도가 내려갈까 냉장고 문도 못 열어봤다고 했다.

올 봄 봉순씨가 집 옆 텃밭에서 낑낑거리시길래 뭐 하시냐 물었더니 밭에 비닐을 씌우는데 이제는 비닐을 끌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대여섯 고랑밖에 되지 않아서 잠깐 차를 세우고 얼른 도와서 멀칭을 했다. 뭐 심으실 거냐고 했더니 감자, 옥수수, 고추 등을 심어 드실 거란다. 작년까지만 해도 혼자서 어찌어찌 했는데 올해는 버겁다고 하셨다.

복순씨는 시티100 오토바이를 잘 타고 다녔었는데 올해부터는 허리, 다리가 너무 아파서 전동3륜 오토바이로 바꾸셨다. 맨 처음 연습을 좀 하고 타고 싶은데 집에서 운동장까지 끌고 가기가 겁나신다며 운전 연습 지도를 부탁하셨다. 나는 이틀간 두어 시간씩 운전 연습을 봐 드렸다. 요즘엔 한평생 오토바이를 타셨던 자락으로 전동3륜 쯤이야~ 하듯 잘 타고 다니신다.

요 며칠간 나는 구리시장에 가서 다시멸치와 황태채, 볶음용멸치, 진미채 등을 구입하고 새우젓과 멸치액젓, 새우젓, 까나리액젓 등을 샀다. 이제 곧 김장철이 올 텐데 그 전에 마음만은 잰걸음으로 김장준비를 하고 싶은 우리 할매들을 위해서다. 너나 할 것 없이 5kg, 10kg짜리 젓갈을 들고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매년 내가 즐거이 하는 일이다.

차에 싣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상을씨 집에 액젓 하나, 순덕씨 집에 액젓 둘… 하며 현관문 안에 넣어다 드리고 왔다. 집으로 향하며 집집마다 텃밭에 심어둔 무, 배추들이 무사히 잘 자라 주길 기도하며 돌아왔다.

지난주 어머니는 80대 할머니들을 모시고 옆 동네 구절초꽃, 무궁화꽃 구경을 다녀오셨다. 하늘 높고 푸른 가을날 더 추워지기 전에 꽃구경하고 불고기 맛있게 잡숫고 오셨단다.

그 얘길 들은 우리마을 옆 마을 50~70대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밥 한번 대접하고 싶으시다며 나서셨다. 오늘은 할머니들이 하남 꽃시장에 구경 다녀오셨단다. 아마도 다음주엔 삼악산 케이블카를 타러 다녀오실 듯하다. 앞으로 레고랜드도 다녀오셔야 하고 영화구경도 다녀오셔야 하는데 어디 그뿐인가. 세상엔 우리 할매들이랑 갈 곳도 먹을 것도 너무 많다.

오늘 아침 늦가을 세찬 비에 힘없이 누워버린 벼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가을날 논밭에 해야 하는 일은 차고 넘치지만 나는 우선 우리 할매들 살아계실 때 함께 실컷 웃고 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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