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농사꾼의 명절

  • 입력 2022.09.16 11:00
  • 기자명 정성숙(전남 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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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숙(전남 진도)
정성숙(전남 진도)

추석날 아침에 시어머니가 계신 광주에 가는데 해남 지역 곳곳에서 일꾼들이 거름을 뿌리기도 하고 비닐을 씌우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다급한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며칠 전의 태풍으로 땅이 마르지 않아 명절 지나고 차분히 시작하려던 일을 앞당겨서 처리하느라 성묘든 명절이든 뒷전이다. 며칠 만에 또 태풍이 생겨서 11일 오후부터 4일 동안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농사꾼들의 명절을 밀쳐냈다. 겨울배추를 미리 심지 않았다면 나도 저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숨 가쁘게 뛰어다니고 있으리라.

9월 10~25일 즈음에 겨울배추를 심는 해남과 진도에서는 그야말로 긴장 상태다. 인력 확보가 쉽지 않은 데다가 태풍과 비가 농사꾼들을 쫓는다. 배추 심기 한 달 전에 인력을 예약한 다음에 역산해서 파종을 한다. 파종한 지 23일경의 배추 모종이 가장 건강한 상태이다. 20일 되기 전에는 모종의 뿌리가 부실하고 25일 정도 지나면 노화가 진행되기에 정식 날짜를 잘 조절하는 게 관건이기도 하다.

땅이 질면 비닐을 씌울 수 없기 때문에 흙이 잘 말라 있을 때 퇴비를 뿌리고 트랙터 로터리를 친다. 비료와 붕사 그리고 토양살충제를 뿌리고 다시 트랙터 로터리를 친다. 그 다음에 뿌리혹병 약을 뿌린다. 또 다시 트랙터 로터리를 치고 비닐 씌우는 작업을 한다. 이 과정에서 바쁘거나 급하다고 한 가지라도 거르면 나중에 치명적인 복병을 만날 수가 있다.

배추 심기 바로 직전에 비닐을 씌워 놔야 배추 심는 작업이 수월하지만 맑은 날을 기약할 수 없다. 9월 7~8일, 이틀 동안 배추를 심으려고 8월 말일에 비닐을 씌웠다. 이앙기에 피복기를 부착해서 비닐을 씌우는데 한쪽의 흙이 제대로 올라가지 못해서 비닐이 벗겨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허술했다. 비닐 씌워진 상태가 미덥지 않아서 뒤따라 다니며 계속 흙을 더 올려주려니 너무 힘들었다. 피복기 좀 조절해보라고 남편한테 짜증을 냈다. 남편은 이것저것 만지며 몇 차례 조절해도 잘 되지 않으니 나한테 버럭 화를 냈다. 다른 일꾼들도 있는데 계속 우기기 민망하고 내가 너무 까탈 부리는가 싶어 남편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9월 5일에 태풍 힌남노가 몰려왔다. 밤새 바람이 거칠게 불면서 200mm 넘는 비가 쏟아졌다. 고개 숙이며 여물고 있는 벼 이삭이 걱정이라 잠들 수 없었다.

9월 6일 아침에 바람이 잦아들자 들에 나가봤더니 씌워놨던 비닐이 벗겨져 사방에서 펄럭였다. 인근에서 가장 실하다 싶던 대파는 바닥을 깔고 누워 있었다. 벼는 무탈했다. 감지덕지다. 벗겨진 비닐을 다시 씌우려면 다소 힘이 들겠지만 수습할 수 있는 일이라 별 거 아니다 싶었다. 벗겨진 비닐을 다시 씌워볼까 싶어 밭에 들어가자 발을 딛고 걸을 수 없이 빠졌다.

9월 7~8일에는 인력 2명을 추가로 데려와서 배추를 심을 수 있게 벗겨진 곳의 비닐을 다시 씌우면서 배추를 심었다. 배추를 심으려면 먼저 비닐 정리 작업을 해줘야 하는데 미처 하지 못해서 모종을 나르던 나까지 손을 보태 가며 일의 진행을 맞춰야 했다. 벗겨진 비닐을 다시 손보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발이 질퍽하게 빠진 채 진흙을 떠 올려야 하니 금방 숨이 차고 허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모종을 나르며 새참과 점심을 갖고 오고 날씨까지 더워서 일꾼들에게 얼음물을 수시로 갖다줘야 했다. 핸드폰이 몇 번 울려도 받지 못했다.

배추를 다 심고 일꾼들이 가자마자 뒷정리는 놔두고 집으로 달렸다. 외지에 있던 아들이 밤에 도착한다 했으니 밥부터 안쳐 놓고 핸드폰을 열었다. 시어머니가 3번이나 전화를 했다. 시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올해는 농사일로 바쁠 테니 송편이나 전은 하지 말고 배추 두 포기만 김치 담아 오니라 하셨다. 다음날은 벌초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데 김치라니… 하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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