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중학생 이성선이 서울 방산동의 집을 나선다. 이윽고 을지로4가의 전차 정거장에 이르렀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돈암동의 경동중학이다. 이성선이 서 있는 전차 정거장의 좌우로는 부단히 우마차가 지나다닌다.태평양 전쟁 이전에는 서울 시내에 버스도 다녔으나, 전쟁이 터지자 일제가 기름부족을 이유로 운행을 중단해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화물은 우마차로 운반되었다.그러니까 길 가운데로는 근대 문명의 발명품인 전차가 다니고, 그 양쪽 옆으로는 중세 시대의 교통수단이라 할 우마차가 지나다니는 묘한 부조화…그것이 일제 말 서울시내의 거리 풍
“내가 알기로는 서울에 전차가 도입된 때가 1899년 무렵으로 아는데…그러니까 당시 미국 사람이 조선 황실로부터 영업권을 얻어가지고 종로에서 청량리까지 갔던 것이 시초라던가….”1929년생으로 청계천 일대에서 ‘서울의원’이라는 동네의원을 운영하며 살아온 이성선 원장은, 우리나라에 처음 전차가 도입된 내력을 이렇게 들었노라고 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1898년 2월, 고종의 명을 받은 육군총장 이학균이 콜브란(Corlbran)이라는 미국 사람과 마주 앉았다, 이학균이 먼저 입을 연다.“궁궐 안에 전등이 가설된 이후에,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 첫사랑 떠나간 종점 / 마포는 서글퍼라정두수가 노랫말을 짓고 박춘석이 곡을 만들고 은방울 자매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가요 ‘마포종점’의 제1절 가사가 이렇다. 이 노래의 제2절에는 당인리 발전소도 나오고 여의도 비행장도 나온다. 그래서 ‘마포 종점’은 지금도, 서울에서 살았던 나이 든 축에게는 아련하면서도 ‘서글픈’ 향수를 불러일으킨다.이 노래가 발표됐던
제주의 견습 테우리 소년이 은퇴를 앞둔 베테랑 테우리를 따라 한라산 중턱을 오른다. 소년은 말 테우리 노릇의 ‘오름에서 한라산까지’ 모든 것이 궁금하다.“할아버지가 모는 말이 예순 마리나 된다면서요, 그 말들을 어떻게 다 알아봐요?”“오래 하다보면 말들하고도 얼굴을 익히는 법이야. 정 모르면 엉덩이에 찍힌 내견을 보고 구분하기도 하고,”“점심은 어디서 먹어요?”“다른 테우리들 하고 어느 내창에서 만나자고 미리 약속을 했다가 거기 모여 먹는 거란다.”평소에, 자신이 관리하는 말들이 주로 풀을 뜯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테우리들은 여럿이
“어쩐 일로 내견장에 말을 네 마리나 끌고 나왔어?”“아, 금년에 요놈들 내견 지질 때가 돼서….”“아이고, 자네 어제 읍내 가더니만 대장간에 내견 만들러 갔었구먼.”내견. 말 엉덩이에다 쥔장이 찍는 불도장을 이르는 말인데, 한자말 같지만 그게 아니고 순수한 제주 사투리다.어미 말이 새끼를 낳으면 한 살 때까지는 어디를 가나 자기 새끼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따로 표시를 해두지 않아도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 그러나 두 살이 넘어서면 어미 품을 떠나 독립을 한다. 그래서 2년차 되는 때에 엉덩이에 표시를 해두어야 한다.그러니까 내견
이른 봄, 한라산 테우리가 말 수십 마리를 이끌고 들로 내려왔다. 오늘 작업을 하기로 약정된 보리밭 어귀에서, 먼저 간 선배 테우리의 영령을 위무하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물경 백여 마리에 이르는 말들을 널찍한 보리밭으로 몰아넣는다. 그렇다면 테우리는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통솔해서 밭 볼리기를 했을까?“테우리는 선도를 사고(서고) 그 주름에 사람들이 몰(말)을 딴 데로 못 가게 에워싸서 테우리 있신(있는) 데로만 몰아주면 테우리가 자동차 운전하듯이 욜로 가고 절로 가고 돌아오고…”송종오 할아버지의 얘기에 따르면, 말들을 밭으로 몰
한라산 중산간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가 망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아서 ‘청년 말’로 키웠다. 하지만 사람도 덩치만 불린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듯, 말도 제 노릇을 하자면 교육이 필요하다.농부가 선머슴 같은 말을 끌고 찾아간 사람은 왕년에 마을 사람들의 말을 위탁받아서 산으로 몰고 다니면서 목동 노릇을 했던 퇴역 말 테우리다.그 베테랑 테우리가 설익은 말을 조련하는 데에 교재로 활용하는 도구는 ‘남테’다.“남테라고, 몰(말) 대신 나무로 만들어서 밭을 볼리는 거야마심. 돈 있는 사람들은 삯 줘서 몰을 빌려다가 밭을 볼리니까 남테가
교래리는 한라산의 산간 마을이라 밭농사의 소출이 시원찮으면 주민들은 끼니걱정을 달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오지마을에서도 비할 바 없이 풍족한 것이 하나는 있었다. 사방에 지천으로 널린 땔감이었다. 사람들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수십 리 떨어진 오일장 터로 가져가서 일용할 양식이며 생활용품들을 바꿔 왔다.물론 그 시절엔 육지의 산간마을 사람들도 땔나무를 장에 내다 팔아서 먹을거리며 고무신 따위를 구했으나, 고작 지게 등짐으로 운반을 했기 때문에, 한 짐 지고 가봤자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고 나면 변변하게 구해올 수 있는 물품이 없
옛 주소로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한라산의 북동쪽에 위치한 이 산간마을 일대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어서 일찍부터 가축의 방목지로 이용되어 왔다.이 마을에 있는 대규모 분화구 터인 산굼부리는 신혼여행이나 수학여행 차 제주에 온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필수 관광코스로 각광을 받아 왔다. 마을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승마장들은 모처럼 말을 타보려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물론 그 말들은 울타리가 둘러쳐진 목장에 갇혀서 사료를 먹으며 사육되고 밤이면 축사로 들어가 잠을 잔다. 그렇다면 오륙십 년 전에, 그 산간마을 사람들은 말들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시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1960년 4월 26일 오후 1시.-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습니다.대통령 이승만이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아서 하야성명을 발표했다.아나운서들은 충무로 입구에 있던 라는 중국음식점에 모여서 ‘아나운서 중립화 선언’을 기초해서 발표한다.-첫째, 방송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불편부당,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둘째, 우리들 아나운서 일동은 방송의 중립화를 요구한다.-셋째, 우리들은 앞으로 공정성을 잃은 일체의 편파적 방송을 거부한다.무슨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3장 같은
라디오방송 아나운서들이 운동경기만을 중계했던 건 아니었다. 군부대의 군사훈련 실황을 중계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고, 국가 원수가 외국에서 돌아올 때면 예외 없이 김포공항에서 열리는 귀국 환영식을 실황 중계해야 했다.심지어는 한강변 상공에서 공군이 벌이는 곡예비행, 즉 ‘에어쇼’도 중계했다. TV가 없던 시절의 라디오방송 아나운서는 순전히 ‘말’로써 활동사진을 스케치해서 청취자에게 보여주는 요술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나운서를 일컬어 말을 운전하는 사람, 즉 언어운사(言語運士)라 했던 것이다.1960년 4월, 자유당 정권의 독재
1950년대 초의 어느 날 서울 종로거리에, 동대문 방향으로 가는 전차가 달려와 멎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탄다. 탑승객들 중에는 임택근이라는 새내기 아나운서도 섞여 있었다. 이내 전차가 다시 정거장을 출발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임택근이 신문지를 돌돌 말더니 마이크 삼아 쥐고서, 창밖을 내다보며 중계방송을 시작한다. 매우 크고 빠른 소리로.-지금 전차는 종로 3가를 출발하여 동대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좌측에 보이는 간판들은 종로지물포, 사거리전당포, 제일서림, 중앙치과의원, 청계포목점, 한양사진관, 그리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