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나운서④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 입력 2018.11.02 15:1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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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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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초의 어느 날 서울 종로거리에, 동대문 방향으로 가는 전차가 달려와 멎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고 또 탄다. 탑승객들 중에는 임택근이라는 새내기 아나운서도 섞여 있었다. 이내 전차가 다시 정거장을 출발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임택근이 신문지를 돌돌 말더니 마이크 삼아 쥐고서, 창밖을 내다보며 중계방송을 시작한다. 매우 크고 빠른 소리로.

-지금 전차는 종로 3가를 출발하여 동대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좌측에 보이는 간판들은 종로지물포, 사거리전당포, 제일서림, 중앙치과의원, 청계포목점, 한양사진관, 그리고 그 아래쪽에 호떡집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점잖은 외양의 젊은이가 내보인 그 돌발적인 행동에 처음엔 뜨악해하던 승객들이, 이윽고 키득키득 웃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택근의 그 요상한 중계방송 놀이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전차의 전진방향을 향했을 때 오른쪽의 창밖 풍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부흥상회, 시계수리점, 샤넬양장점, 서울정육점, 남일상회, 흥국철물, 아, 지금 말씀 드리는 순간에 서울정육점 밀창을 열고 할아버지 한 분이 슛! 골인되었습니다!

전차의 객실 안에 폭소가 터진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임택근은 스포츠 중계방송의 대명사로 단련됐다는데, 임택근이 처음으로 시도했던 그 ‘길거리 간판 읽기’식 현장 실습은 그 뒤 한동안 신입 아나운서들의 훈련 방법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임택근이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을 외쳤던 경기는 1956년에 호주의 멜버른에서 열렸던 올림픽경기였다. 올림픽의 꽃이라 할 마지막 날의 마라톤 경기-.

한국에서는 이창훈 선수에게 한껏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임택근 씨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 동안 맨땅에서 흙먼지 마시면서 중계를 하다가 거대한 올림픽 주경기장을 바라보니 우선 눈이 부시더라고 했다.

“임택근 씨, 이제 곧 선두 그룹이 스타디움으로 진입할 것 같은데, 별문제 없겠지요?”

기술 담당의 장경순이 임택근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런데 별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 이거 큰일이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이 중계석이 경기장 꼭대기에 있다 보니까 너무 멀어서, 선수들이 들어온다 해도 어느 나라 선수인지 구별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다른 나라 방송 팀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데요?”

“둘러보니까, 외국 아나운서들은 모두 쌍안경을 들고 있어요. 그걸 들여다보면서 중계를 할 모양인데 우리는 그런 게 없으니…이거 큰일이네.”

마라톤 선수들이 스타디움에 모습을 나타낼 때부터 그 실황을 중계해야 하는데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선수들의 국적구별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해결한다 했다. KBS 중계석 바로 옆에는 일본의 NHK 방송 팀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경순이 말했다.

“임택근 씨는 일본말 잘 알아듣잖아. NHK 아나운서가 쌍안경을 통해서 하는 중계를 옆에서 듣고서 바로바로 뒤따라 방송을 하자구. 아, 선두 그룹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시작합시다!”

선두에서 달리던 선수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일본의 아나운서에 의하면 선두는 프랑스 선수였다. 이어서 2위, 3위가 들어왔다. 뒤따라서 머리 색깔이 검은 동양 선수가 4위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쌍안경을 보고 있던 NHK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국민 여러분, 우리 일본의 가와자와 선수가 당당하게 4위로 입장하고 있습니다!”(NHK)

“아, 우리 선수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4위는 일본선수입니다.”(KBS)

하지만 얼마 뒤 대반전이 연출되었다. 드디어 선수들이 코너 트랙을 돌아 중계석 아래쪽으로 가까워졌는데, 4위로 들어온 선수의 가슴에 새겨진 것은 일장기가 아니라 태극기였던 것이다. 임택근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우리 한국의 이창훈 선수가 마라톤 경주에서 당당히 4위를 차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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