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나운서⑥ 5.16 쿠데타 - 「혁명공약」을 낭독하다

  • 입력 2018.11.18 14:01
  • 수정 2018.11.18 20:3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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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시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1960년 4월 26일 오후 1시.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습니다.

대통령 이승만이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아서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아나운서들은 충무로 입구에 있던 <동해루>라는 중국음식점에 모여서 ‘아나운서 중립화 선언’을 기초해서 발표한다.

-첫째, 방송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불편부당,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우리들 아나운서 일동은 방송의 중립화를 요구한다.

-셋째, 우리들은 앞으로 공정성을 잃은 일체의 편파적 방송을 거부한다.

무슨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3장 같은 이 선언은, 얼핏 보기에는 정의감 넘치는 언론인들의 비장한 결의가 담긴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였던 것처럼 동해루라는 ‘요릿집’에 모였다는 공통점을 빼고는.

“결의문을 공보실에 전달했는데, 국영방송의 직원이 상사와 의논도 없이 성명을 내는 것은 공무원의 복무조항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려되고 말았어요. 처음엔 우리에게 사표를 내라고 윽박지르던 공보실장이 나중엔 양복 한 벌씩 해줄 테니 방송 복귀하라고 회유를 하더라고요.”

그 시기에 KBS의 아나운서 실장을 맡았던 임택근 씨의 회고다.

당시 아나운서들의 결의에 무슨 자유언론을 향한 강인한 실천의지 같은 것이 담겼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그 동안 이승만 정권의 온갖 부정과 부패에 침묵함으로써 시민들로부터 ‘독재정권의 앵무새’라고 놀림을 당하다가, 학생들이 피 흘리며 저항해서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자 그때에야 나서서 뒤집힌 판세에 영합하려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1년여 뒤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를 비롯한 일단의 군인들이 헌병 경비대의 저지선을 뚫고 한강을 돌파하여 제1차 점령 목표인 KBS 남산 청사로 들이닥쳤다.

“집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에 전화가 왔어요. 군인들이 방송국에 들이닥쳐서 비상이 걸렸다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택시를 잡아타고 방송국을 향해 달려갔지요. 그날 숙직 근무자는 박종세 아나운서였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박종세를 비롯한 당직근무자들은 기관단총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전쟁이 난 줄 알고 기계실로 대피를 했다가 2층 스튜디오로 불려 올라갔다. 별 둘을 단 작달막한 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였다. 그래서 쿠데타 세력이 미리 작성한(나중에 김종필이 쓴 것임이 밝혀짐) ‘혁명공약’을 낭독하여 방송으로 내보낼 사람으로 박종세 아나운서가 낙점되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입법·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서 군사혁명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이어서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로 시작되는 소위 ‘혁명공약’이 줄줄이 전파를 탔다.

임택근 아나운서는 그 쿠데타 국면에서 스스로는 무슨 역할을 했는지, 취재하러 간 나에게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5월 18일에 육사 생도들이 ‘5.16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했는데, 임택근은 마이크를 들고 (중계차에 타지도 않고)그 행렬을 따라서 걸어가면서 실황중계를 함으로써 박정희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쓴 글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나도 혁명을 완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인 중계방송을 맡았다는 중책감에서 피곤한 것도 배고픔도 잊은 채 일에 몰두했었다. 내 일생에 가장 바쁘고 보람 느꼈던 날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언론(인)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상기하면 4.19 때 <동해루>에서 발표했던 그 결의문이 매우 초라해 보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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