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아나운서⑤ 4.19 혁명과 아나운서의 수난

  • 입력 2018.11.11 18:52
  • 수정 2018.11.11 19:0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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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라디오방송 아나운서들이 운동경기만을 중계했던 건 아니었다. 군부대의 군사훈련 실황을 중계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고, 국가 원수가 외국에서 돌아올 때면 예외 없이 김포공항에서 열리는 귀국 환영식을 실황 중계해야 했다.

심지어는 한강변 상공에서 공군이 벌이는 곡예비행, 즉 ‘에어쇼’도 중계했다. TV가 없던 시절의 라디오방송 아나운서는 순전히 ‘말’로써 활동사진을 스케치해서 청취자에게 보여주는 요술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나운서를 일컬어 말을 운전하는 사람, 즉 언어운사(言語運士)라 했던 것이다.

1960년 4월, 자유당 정권의 독재정치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4.19 혁명이다. 그 시기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 사이에서 국영방송인 KBS의 아나운서는 ‘정권의 앵무새’라고 조롱을 당했을 만큼 불신이 팽배했다.

전쟁이든 정변이든 점령군, 혹은 정변의 주도자들이 가장 먼저 장악을 시도하는 곳이 바로 방송국이다. 당시 KBS 방송국은 정동 시대를 마감하고 남산에 자리하고 있었다. 임택근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방송국에서 내다보니까 총소리가 나고 시위군중의 함성이 들려오고 난리가 난 거예요. 서울신문사와 동대문경찰서가 불타오르면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한참 있으니까 시위대의 함성이 점점 가까워지더라고요. 정보에 의하면 시위대가 이제 곧 이승만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해온 KBS를 때려 부수러 온다는 거예요. 무서웠지요. 더구나 그때 내가 KBS 아나운서실의 실장이었거든요. 아이고 난 죽었구나, 했지요.”

임택근은 당시의 이을룡 국장과 함께 방송국의 뒷담을 타고 넘어 달아나서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국립박물관장의 관사로 가서 은신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국 경비원이 헐레벌떡, 그 피신처에 나타났다.

“큰일 났습니다. 임택근 아나운서를 당장 안 데리고 오면 방송국을 가만두지 않겠답니다.”

“왜 하필 나를 찾아? 국장님도 계시고 다른 간부들도 있는데, 나는 일개 아나운서야.”

“지금 저한테 그런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요. 성난 데모대가 당장 임택근 아나운서 데리고 오라고 난리예요.”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은 방송국의 직제나 운영체계를 상세히 알 리 없었기 때문에, 우선 그들이 늘 목소리를 들어온 아나운서가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임택근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방송국에 진을 치고 있던 데모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 대표가 나한테 그러는 거예요. ‘당신은 말이야, 운동장에 가서 <숫, 골인!>은 잘하면서 왜 우리 학생들이 부정과 부패에 항거해서 들고 일어난 이 정의로운 싸움은 중계방송을 안 하는 거야!’…그렇게 따지는 겁니다. 하지만 국영방송인 KBS에서 그런 중계를 하도록 허가가 나올 리도 없을뿐더러, 더구나 아나운서가 마이크 들고 거리에 나가서 ‘지금 경관이 발포했습니다. 학생 A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이럴 수는 없잖아요.”

‘아나운서와 중계방송’이 시민들 사이에 라디오방송의 상징 코드로 인식돼 있었던 때문에 그런 항변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 때 학생 대표 중 일부 강경파가 당장 방송국을 때려 부수자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온건한 학생들이 나서서 방송국은 이승만의 재산이 아니라 국민의 재산이다, 이렇게 설득해서 위기를 넘겼다.

학생 대표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성명서를 임택근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방송해준다는 조건으로 순순히 방송국을 물러났다. 하지만 정부 측에서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보처 장관실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학생들 주장은 방송을 불허한다면서, 그 대신 이승만 대통령의 4선을 축하한다는 미국 국무장관의 축하전문을 방송하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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