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청암면에 자리한 하동호는 1985년 1월에 착공하여 1993년 11월에 준공한 농업용 댐으로 청학동 계곡과 묵계 계곡의 물들이 흘러들어 거대한 산중호수를 만들었다. 지리산 둘레길 10구간과 11구간이 연결되는 지점에 있는 이 하동호를 한 바퀴 도는 하동호 둘레길이 새 단장을 하고 2000년 봄에 완성되었다.전체 길이 7.5km에 수평의 길이라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 둘레길 구간에는 포함되지는 않은 상태다. 이 하동호 둘레길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은 뭐니 뭐니 해도 아름드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 새벽, 컴컴한 적굴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은 불과 하루 전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였다. 판결은 그날로 국왕의 재가를 받아 날이 바뀌자마자 형이 집행되었다(속전속결, 훗날 이날의 모범을 충실히 따른 자가 있었으니 박정희다. 이 자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 피고인 8명을 형 확정 18시간 만에 사형시켰다. 세상에는 역사를 이렇게 계승하는 자도 있다).1894년 4월 백산대회에서 이름을 올린 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총
지리산의 봄은 코로나19 파동과는 무관하게 해마다 연초록 새순과 온갖 꽃들로 숲을 화려하게 장식해 왔지만 이번 봄은 2020년 이후 마스크로부터 해방된 첫봄인지라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그동안의 억눌림을 봄꽃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한다.특히 섬진강 매화마을이나 구례 산수유마을 그리고 홍매로 유명한 화엄사는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2023년의 봄이다. 그리고 만나기 힘들긴 하지만 봄의 진객인 노루귀나 바람꽃 등을 찾아 깊은 산속을 헤매는 들꽃 애호가들이 SNS에 올리는 화려
1895년 3월, 을미적 을미적 봄이 오고 있었다. 허나 봄이 왔으되 봄이 아니었다.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든 동학농민군과 침략자 일제의 충돌, 조선의 명운을 건 한판 대결, 우금티 패전 이후 조선은 피바다에 잠겼다. 참빗 작전이라 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해외 침략의 첫걸음부터 피바람을 몰고 왔다. 참빗으로 훑어내리듯 씨를 말려 화근을 없애버리겠다는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에 조선 관군이 동원되고 민보군이 앞장서는 골육상쟁의 비극이 벌어졌다.임무를 마친 일본군이 인천으로 귀환하고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들은 재판에
무엇을 전환하고 넘고 싶었던 것일까한때 시민사회 운동 영역의 대주제는 ‘전환시대’였다. 전환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취지였다. 농민운동 부문에서의 ‘전환시대’는 투쟁을 넘어 대안을 만들어가자는 뜻이었다. 또 다른 유행으로는 ‘넘어’라는 동사가 붙는 형태였다. ‘이분법을 넘어’, ‘적대적 관계를 넘어’도 자주 썼다. 너는 너, 나는 나의 갈라섬을 극복하고 동지 관계를 회복하여 체제나 이념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의지 표현이었으리라.전농 창립 30주년을 맞이해 ‘지금은 전환시대, 투쟁 아닌 대안
하동 지리산문화예술학교, 남원 산내 진달래산천, 함양 온배움터, 구례 봉서리책방, 산청 공간산아… 지리산 자락에 깃들어 움 틔우고 있는 울타리 없는 학교이자 움직이는 교실들이다. 물론 지리산 5개 시·군에서 한 곳씩만 나열한 것이라 지리산 아흔아홉 골에 숨어 있는 숱한 배움터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그중에 필자가 교사로 참여하고 있는 지리산문화예술학교는 2009년 지리산학교로 출발해서 지금은 지리산문화예술학교(지리산행복학교)로 그 이름이 바뀌어 14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필자는 올해로 4년째 초록걸음반 수업을 진행할 예정
우금티 혈전 이후 농민군 주력부대가 남쪽으로 퇴각하던 시기 대둔산을 근거지로 유격 항전을 개시한 부대가 있었으니 금산, 진산, 고산 등지의 농민군들이었다.이들은 우금티 전투 이전 를 맞아 금산, 진산 등지에서 치열한 매복 기습전으로 맞섰으며 일본군이 우금티로 몰려간 이후에는 관군이 몰려오면 사라졌다 떠나가면 다시 나타나는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이들이 대둔산에 근거지를 마련한 것은 12월 초순(양력) 퇴각하는 농민군 주력부대가
올해도 눈 쌓인 천왕봉을 바라볼 수 있고 중산리 계곡물과 대원사 계곡물이 만나 이루는 덕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천재에서 내 방식의 나 홀로 새해 시무식을 했다. 4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천왕봉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산천재 앞마당의 남명매가 그 증인인 셈이다.새해엔 ‘선택과 집중’을 화두로 내 능력 밖의 일들은 내려놓기로 했다. 닭을 보살피는 농장 일과 ‘있는 그대로의 지리산’을 위해 길동무들과 함께 지리산을 걷는 초록걸음이야 변함이 없겠지만 지난 연말부터 이런저런 자리들을 내려놓았으니 2023년엔 좀 더 홀가분하게 닭과 지리산에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잠행에 들어간 전봉준 장군은 사흘 만인 12월 28일(양력) 피노리에서 피체되었다. 하루 앞선 27일 태인 종송리에서 김개남 장군이 피체되었다. 전봉준은 나주로 김개남은 전주로 압송되었으며 전주로 압송된 김개남은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즉결 처형되었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에는 손화중 장군이 고창에서 피체되었다.이즈음 농민군들의 형편은 어떠했을까? 부대는 해산되었으되 돌아갈 곳이 없었다. 시시각각 추격해오는 조일 연합군, 앞을 막아서는 민보군이 기승을 부렸다. 내내 숨을 죽이고 사세를 엿보던 양반
엄마가 돌아가신 그해에는 산소 근처에서 시묘살이라도 살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근처에 들를 일이 있으면 혼자서라도 산소에 들렀다. 하지만 이제는 여름에는 풀도 무섭고, 겨울에는 쌓인 눈이 무서워 이래저래 띄엄띄엄이다. 무엇보다 세월이 한참 지나 또렷했던 슬픔도 곰삭아 형체도 흐물흐물해져 버려서다. 그래도 아버지나 오빠가 가면 나들이 삼아 가끔 따라나선다. 엄마의 음택이 있는 충북 음성군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내 본적지다. 큰아버지가 할머니 모시고 오래도록 고향을 지켰으므로 지금은 귀물처럼 되어버린 ‘시골 할머니댁’, ‘시골 큰집’을 향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이 땅의 현실이 팍팍하기 그지없지만 지리산의 너른 품에 안겨 살아가는 까닭에 그나마 올 한 해도 잘 견디어 냈다. 하지만 날마다 만나는 그 지리산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 확실치도 않은 돈 몇 푼에 눈이 먼 개발 망령이 지리산 자락을 떠돌아다니면서 뭇 생명들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엄동설한에도 지리산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손팻말 시위와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하동군청 앞에서는 형제봉 주변에 산악열차와 케이블카에 모노레일까지 건설하겠다는 알프스하동프로젝트의 철회를 요구하는 손팻말 시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격전 우금티 전투가 개시되었다. 나는 장성 갈재 아래 입암에 서 있다. 잠행에 나선 전봉준 장군이 스며들었던 입암산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무 말이 없다. 그이의 발자취를 거꾸로 밟아 올라간다. 곧게 뻗은 국도를 달린다. 태인, 원평, 전주 스쳐 삼례, 여산, 논산, 노성 지나 이인 … 북진하는 농민군이 지났던 고을들이 휘리릭 지나간다.곰티재로 향한다. 11월 22일 1차 공주전투, 농민군은 우금티에 앞서 곰티재를 넘어 공주를 공략하고자 했다. 농민군 복장의 전봉준 장군은 붉은
지난 2년간 에 매월 초 원고지 30매 분량의 글을 기고해왔다. 내 글에 관심을 보인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나온 것으로 아는데 왜 굳이 농업경제학을 전공했느냐. 농업경제학을 하면서 왜 행복경제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느냐.필자는 한국전쟁 중에 강원도의 반농·반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무렵의 거의 모든 농촌이 그랬듯이 내가 살던 마을도 참으로 가난했다.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어부들은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에 나갔다. 어린 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잘
10.29 참사로 인해 지리산 곳곳 이름난 단풍 명소들의 화려한 단풍 풍경을 예전처럼 마냥 아름답게 볼 수만 없는 가을의 끝자락이다. 엄밀히 말하면 단풍은 물드는 게 아니라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많은 광합성을 하기 위해 녹색으로 위장을 하고 있다가 월동을 위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그리곤 나무들은 제 가진 것 죄다 땅으로 되돌려 보내고 한겨울을 꿋꿋이 견디면서 봄을 기다린다. 수많은 생명들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내몰린 이 슬픔의 계절에 붉디붉은 단풍잎들의 화려한 사진을 차마 올릴 수가 없다.
해월 최시형, 그는 평생을 바쳐 동학 포교에 전념했다. 교조 최제우 순교 이후 그의 활동은 거의 대부분 지하에서 이뤄졌다. 그의 기나긴 잠행과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동학은 조선 민중의 가슴 속 깊이 뿌리내린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됐다. 동학은 그 자체 교리가 품고 있는 민중성과 혁명성으로 하여 조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관의 늑탈과 탄압 속에서 구축된 견고한 조직망은 사회변혁을 꿈꾸는 혁명가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됐다.최시형·이필제, 영해봉기를 성공시키다이필제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가 낳은 직업적
히말라야 고산에 위치한 인구 80만명의 작은 왕국 부탄이 지난 9월부터 국경을 완전히 개방했다. 코로나 팬데믹 발생 이후 거의 3년 만이다. 국민총행복전환포럼 회원들과 함께 부탄을 방문하기로 했다. 10여명의 회원이 신청하여 부탄 여행을 준비하던 중, 부탄 정부로부터 ‘지속가능발전 요금(Sustainable Development Fee, SDF)’으로 하루 200달러(약 49만원)를 매일 지급하라는 통보를 받았다.1974년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관광을 허용한 부탄은 “높은 가치, 낮은 영향(High Value, Low Impact)”
올해는 지리산 둘레길 21개 구간 290㎞가 완전히 개통된 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지난주엔 지리산 둘레길 곳곳에서 완전 개통 10주년 행사가 다채롭게 열렸다. 2019년 세계 최장 야생화길로 인정받아 세계기네스북에 등재된 지리산 둘레길은 지난해엔 산림청이 지정한 ‘국가숲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올레길과 함께 우리나라 걷기 열풍을 주도해온 지리산 둘레길은 명실상부한 생명과 평화의 길임이 분명하다.필자도 ‘숲샘과 함께 걷는 지리산 초록걸음’이란 이름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11년째 길동무들과 함께 걷고 있다. 산악열차나 케이블카
갑오년 9월(음력) 마침내 농민군이 다시 일어섰다. 전봉준은 각지의 관아에 재기병을 알리는 통문(양력 10월 8일)을 보내 농민군 재기병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에 착수했다.“일본군을 쳐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구축할 마음으로 다시 기병하자”는 취지의 격문을 받아 든 각처의 농민군은 군현의 무기고를 헐어 무장을 갖추고 삼례와 남원을 거점으로 한 전봉준, 김개남 휘하로 모여들었다.한편 최시형 교주는 청산에 각 포 접주들을 불러 모아 전봉준과 협조하도록 당부(양력 10월 16일)하고, 궐기하라는 통문을 내렸다. 이로써 동학농민군의 9
필자는 4년 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국민총행복전환포럼’을 창립하여,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경제성장에서 국민총행복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 ‘경제성장에서 국민총행복으로의 전환’인가?50년 전 가 예측한 지구의 미래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The Limits to Growth)가 올해로 발간 50주년을 맞이했다. 는 ‘성장으로부터 지구 균형으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에서 미국 MIT 연구팀은 컴퓨터 모델(월드3)을 이용해 인구, 식량생산, 산업화,
백일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는 배롱나무. 꽃 한 송이 한 송이보다는 모여 핀 꽃과 수형이 아름다워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배롱나무는 7월부터 꽃을 피워 가을로 접어드는 9월 말까지 꽃을 매달고 있으니 결코 여름꽃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본격적 가을로 접어들 때 비로소 그 붉은 꽃들을 모두 떨구어 내기 때문이다. 지난여름, 그토록 정열적으로 꽃을 피웠던 지리산의 배롱나무들을 떠올리며 언제나 단명인 가을을 예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