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보따리, 해월 최시형

  • 입력 2022.11.20 18:00
  • 기자명 글 이대종, 판화 박홍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보따리, 2014, 35×57㎝, 목판화
최보따리, 2014, 35×57㎝, 목판화

해월 최시형, 그는 평생을 바쳐 동학 포교에 전념했다. 교조 최제우 순교 이후 그의 활동은 거의 대부분 지하에서 이뤄졌다. 그의 기나긴 잠행과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동학은 조선 민중의 가슴 속 깊이 뿌리내린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됐다. 동학은 그 자체 교리가 품고 있는 민중성과 혁명성으로 하여 조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관의 늑탈과 탄압 속에서 구축된 견고한 조직망은 사회변혁을 꿈꾸는 혁명가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됐다.

최시형·이필제, 영해봉기를 성공시키다

이필제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가 낳은 직업적 봉기꾼, 혁명가였다. 그는 결코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봉기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민중봉기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냈다. 그는 일단 한 고을에 잠입하게 되면 그 고을에서 가장 덕망이 높고 인품이 훌륭한 인물을 찾아내 기어코 자신의 동조자로 만들었다. 그는 상대를 설복함에 있어 구체적인 대의명분으로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항상 일의 선두에 서 있었으되 스스로 전면에 나서서 이름을 내는 일에는 관심이 적었다.

그런 그가 동학의 조직망에 주목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는 10여년을 잠행, 포교 중인 최시형을 끈질긴 노력 끝에 끝내 설득하고야 말았다. 최시형과 이필제는 수일간 함께 머물며 영해(오늘날 영덕지방)봉기를 계획하고 성공시켰다. 그들은 교조 순교일(3월 10일)을 봉기일로 정하고 경상도 일대 500여명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영해부를 야습하여 탐관오리 이정을 처단하고 백성을 구휼했다.

영해봉기는 고립·분산적이었던 여타 민란(봉기)과 달리 경상도 16개 고을의 민중(동학교도)들이 치밀한 계획과 준비 속에 ‘제세안민’이라는 뚜렷한 구호를 들고 단행한 거사였다. 영해봉기는 동학의 조직과 민중봉기가 결합된 최초의 사건으로 역사에 남았다.

영해봉기 이후 관군의 추격 속에 동학 조직은 무너졌고 최시형은 또다시 기나긴 잠행의 길로 들어섰다. 시대의 풍운아 이필제는 문경에서 새로운 봉기를 도모하다 발각돼 체포, 처형됐다. 1871년 미군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던 신미년이었다. 이때는 또한 전봉준, 김개남 등 동학농민혁명 주요 지도자들의 청년기에 해당한다. 영해봉기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삼남지방을 휩쓸었던 농민봉기와 더불어 영해봉기는 필시 후대 혁명가들이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반추하고 연구했을 탐구 대상, 혁명의 지침서가 되지 않았을까?

30년 잠행 끝에 내린 최후의 결단

1894년 9월 최시형이 마침내 전국에 대동원령을 내렸다. “인심이 곧 천심이라, 이는 곧 천운이 다다른 것이니 교인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하고 스승의 억울함을 신원하며 우리 도의 대원을 실현하라.” 영해봉기 이후 20년 잠행, 평생을 건 30년 잠행 끝에 내린 최후의 결단이었다. 최시형은 잠행하는 동안 ‘최 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30년 세월, 쉴 새 없이 자리를 옮기면서 다져온 동학의 조직망, 필생의 업적이 조선의 운명을 걸고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최시형의 명이 떨어지자 충청도 전 지역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 전 조선이 궐기했다. 북접의 호응을 얻은 호남 농민군이 북상하여 논산에 이르렀다. 손병희가 이끄는 농민군도 보은을 출발 논산에 도착하여 남·북접 농민군의 역사적 상봉이 이뤄졌다. 10월 16일(양력 11월 13일) 전봉준은 ‘양호창의영수’의 이름으로 “항일대전에 동참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자”는 편지를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냈다. 실상 우금티로 향하는 농민군의 출정 포고문이었다.

그러나 전봉준과 농민군은 그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박제순은 후일 을사오적 중 1인이 되어 천하의 매국노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으니 우금티에 피를 뿌리고 쓰러져간 무수한 농민군의 원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피가 치솟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