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내팽개친 `농(農)'의 가치 … 사회적경제 영역서 지켜내야

  • 입력 2024.02.04 18:00
  • 수정 2024.02.14 15:18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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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농업·농촌·농민의 미래를 위해 어떤 관점으로 접근할지를 놓고 전선(戰線)이 그어졌다. 한쪽엔 관료와 대다수 전문가, 그리고 대자본을 움켜쥔 기업가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기존 시장경제체제에 농(農)의 미래를 계속해서 맡기자고 한다.

다른 한쪽엔 중소농 및 농업·먹거리문제를 해결하고자 활동하는 시민들, 극소수 전문가, 그리고 소위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활동하는 기업가들이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분명한 건 이들 다수는 기존의 시장 중심주의적 논리를 거부하거나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시장’이 농업·먹거리의 앞날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안으로서 협동과 연대에 기초한 ‘대안경제’를 모색한다. 이들이 모색하는 대안경제는 큰 틀에서 ‘사회적경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적경제 영역은 위기에 봉착했다. 농업·농촌과 먹거리 문제를 사회적경제의 관점에서 해결하려는 시도 역시 녹록지 않다. 농업·먹거리 영역 사회적경제 실천주체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회적경제는 농(農)의 미래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사회적경제 예산 삭감, 줄어드는 사회적경제 주체들의 입지

지난해 10월 18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열린 사회적경제 예산 원상복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 문지영 기자
지난해 10월 18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열린 사회적경제 예산 원상복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 문지영 기자

지난해 10월, 윤석열정부는 사회적경제 분야 예산을 대량 삭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전국 각지 생활협동조합·신용협동조합·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사회적기업 등 90개의 사회적경제 영역 조직들은 ‘사회적경제 예산 원상복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꾸려 정부의 ‘사회적경제 정책 지우기’에 맞섰다.

결과적으로 예산 삭감은 현실화됐다. 지난해 약 1조1,201억원이었던 정부 사회적경제 사업 예산은 올해 4,909억원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그나마 원래 약 4,857억원으로 줄어들 뻔한 예산이 공대위의 문제 제기로 일부(약 52억100만원)나마 복원됐다.

단순히 예산이 삭감된 걸 넘어, 사회적경제 주체들의 입지도 좁아졌다. 이는 농업·먹거리 영역도 마찬가지다. 대표적 사례로 서울시의 도농상생 공공급식 사업 ‘개편’으로 인해 생협 등 사회적경제 주체들이 사업 영역에서 사실상 쫓겨난 사례를 들 수 있다. 서울시(시장 오세훈)는 도농상생 공공급식 사업 과정에서 지역산 농산물과 가공식품을 시중 가격보다 저렴하게 공급하고자 노력해 온 생협·사회적기업 등의 주체들을 단순한 ‘이익집단’으로 매도했고, 그 과정에서 여론전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5월 2일 방영된 KBS <시사기획 창> ‘누구를 위한 급식인가’ 편의 경우, 사회적경제 주체들을 매도하며 서울시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해 농민·먹거리운동진영으로부터 ‘왜곡방송’ 시정을 촉구받기도 했다. 해당 방송은 동북4구(강북구·노원구·도봉구·성북구) 공공급식센터의 수탁기관인 한살림연합·행복중심생협 등 생협 조직들이 관내 어린이집에 가공식품을 조합원 대상 판매가 대비 12% 할인해 공급한 내용, 연도별 산지 공급비율을 2021년 73%에서 2022년 75.4%로 늘린 점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인천시 강화군에서 지역 친환경농업 활성화 및 주민 먹거리돌봄 사업 등을 벌이는 서정훈 농업회사법인 콩세알 대표는 “사회적경제 예산을 지원받고 안 받고와 별개로, 사회적경제 영역은 ‘경쟁’을 중시하는 시장경제 영역 기업과 달리 각 주체 간에 상호 연결된 구조다. 따라서 하나의 영역이 (예산 삭감 등으로) 악영향을 받으면 다른 영역도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최근 정부와 지자체가 보이는 행태들은 사회적경제 주체들의 사기를 꺾는 행위다. 이런 상황에선 사회적경제 영역 주체들은 죄인 된 듯한 기분으로 지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서정훈 대표는 간단한 일화를 언급했다. 지난해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부산시 벡스코에서 열린 제5회 대한민국 사회적경제 박람회에 장·차관은 물론이고 국무총리도 발걸음하던 예년과 달리, 장·차관급 인사 하나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적경제 영역이 정부 시선을 중시하는 영역은 아니나, 그만큼 정부가 사회적경제 영역의 육성에 관심을 끊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농업·농촌·농민의 미래 위해 오직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

충남 예산군 농업회사법인 내포에서 제작한 깻묵 연필. 이 연필의 원료는 예산 농민들로부터 수매한 들깨로 기름을 짠 뒤 남은 찌꺼기(깻묵)다. 농업회사법인 내포 제공
충남 예산군 농업회사법인 내포에서 제작한 깻묵 연필. 이 연필의 원료는 예산 농민들로부터 수매한 들깨로 기름을 짠 뒤 남은 찌꺼기(깻묵)다. 농업회사법인 내포 제공

최근 농업·먹거리영역 주체들은 △지역 중소농이 생산한 농산물의 다양한 판로 확보 △지역산 농산물의 합당한 가격 보장 △지역 단위 먹거리돌봄 강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의 일자리 창출 등의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효율성’과 ‘수익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기에, 생산비 절감 목적에서 수입산 원재료를 사용하고 ‘효율성이 담보된 노동자’만을 고용하는 대기업의 입장에서, 이상의 가치들은 도외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활동은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전담할 수밖에 없다.

충남 예산군에서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들깨를 수매해 다양한 가공품을 만드는 농업회사법인 내포(대표 박형, 내포). 최근 내포는 깻묵(깨로 기름을 짜고 난 뒤 남은 찌꺼기)으로 연필을 만들어 시민모금 누리집 ‘와디즈’에 홍보한 바 있다. 예산 내 60농가에서 생산한 들깨·참깨로 기름을 짜낸 뒤 남은 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연필 제작에 사용함으로써 자원 선순환을 실천한 사례다. 내포는 ‘깻묵 연필’ 외에도 들깨·참깨 및 각종 부산물을 활용해 생들깨기름·생참기름·삼베수세미·설거지바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내포 또한 사회적경제 예산 삭감 뒤 어려움이 많다. 내포는 사회적기업 운영을 위한 인건비 1,000만원이 삭감돼 인력 고용에 난항을 겪게 됐다. 사회적기업은 최소 20~50% 수준의 ‘취약계층(장애인·고령층 및 경력단절 여성, 일자리 없는 청년 등) 고용비율’을 유지해야 하는데, 내포는 50%의 고용비율을 유지해야 한다.

엄청나 내포 상임이사는 “일반 기업처럼 업무 ‘효율성’만 따진다면 청년만 고용하면 된다. 그러나 취약계층 고용을 고려해야 하는 사회적기업 입장에선 그럴 수 없고, 다양한 사회 구성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적기업의 책무니 당연히 그리 해야 한다”며 “업무 ‘효율성’ 측면에선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 인력 고용 예산마저 갑작스레 줄어드니 올해는 인력난에 따른 업무 추진 난항이 있을 듯하다”고 우려를 전했다.

내포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들깨를 제값에 수매(시장에서 들깨 1kg은 8,000~9,000원 선에서 수매되나, 내포는 1kg당 1만3,000원 선에 수매)하는 원칙, 지역 내 다양한 주민을 차별 없이 고용하는 원칙, 그리고 수입산 자원순환형 상품이 판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산 자원순환형 상품을 더 많이 만들겠다는 원칙은 고수하고자 한다.

엄청나 상임이사는 ‘사회적경제 영역 지우기’에 일관하는 정부를 강하게 규탄했다. 엄 상임이사는 “정부는 사회적경제 영역 주체들을 ‘예산 빼먹는 식충이’로 보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동안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해 왔던 일, 오직 사회적경제 영역에서만 할 수 있는 역할을 무시한 채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예산 삭감을 감행할 수 있나?”라며 “정부에 사회적 가치 확산을 위해 노력하는 농민·시민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점이 예산 삭감 자체보다도 불쾌하다”고 비판했다.

2022년 10월 8일 충북 괴산군 세계유기농산업엑스포 행사장에서 열린 한살림연합 ‘가을걷이 한마당’ 행사 중 어린이들이 볏짚으로 이어낸 줄다리기용 밧줄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사전 가격 계약을 통한 농민 생산 연속성 보장은 생협이 맡아온 사회적 역할이다.
2022년 10월 8일 충북 괴산군 세계유기농산업엑스포 행사장에서 열린 한살림연합 ‘가을걷이 한마당’ 행사 중 어린이들이 볏짚으로 이어낸 줄다리기용 밧줄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사전 가격 계약을 통한 농민 생산 연속성 보장은 생협이 맡아온 사회적 역할이다.

‘오직 사회적경제 영역’에서만 할 수 있는 활동 중엔 농민과 소비자 간 ‘관계’를 기반으로 한 ‘대안적 유통’ 추진을 꼽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사회적경제 조직 중 한 영역인 생협과 관행 유통공간(대형마트·백화점)의 공급(매출) 증감액과 신선식품지수(채소·과일류 등 신선식품 51개 품목이 계절적 요인 및 자연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가격변동률이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지수) 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가 있었다.

김진호 지역재단 정책연구팀장이 <농어촌 지역발전을 위한 사회적 경제조직의 역할과 발전방향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분석한 데 따르면, 4대 생협의 공급 증감액과 신선식품지수 간 평균 상관관계 수치는 –0.514(A생협 –0.368, B생협 –0.625, C생협 –0.527, D생협 –0.373)였던 반면, 대형마트·백화점의 매출 증감액과 신선식품지수 간 상관관계 수치는 각각 +0.321, +0.615였다.

해석하자면, 양(+)의 수치는 시장에서의 농산물 가격 폭등·락 시 그만큼 유통공간의 농산물 가격편차도 심하게 나타난다는 뜻이며, 음(-)의 수치는 유통공간의 농산물 가격이 시장 가격 변동에 영향을 덜 받는다는 뜻이다. 농산물 가격 폭등·락 시 대형마트와 백화점은 즉각적으로 높아지거나 낮아진 가격을 반영해 판매하는 상황이 양의 수치로 반영된 반면, 생협에선 시장 농산물 가격이 폭락해도 생산자-생협 간 사전 계약한 가격에 맞춰 농산물이 판매되는 구조가 음의 수치로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계약재배를 통한 가격안정기능은 생산자에게 생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평균비용을 보전해 생산 연속성을 보장하고, 시장가격 폭등 시엔 생산자 초과이윤을 적절히 통제해 소비자 구매부담을 덜어준다는 게 김진호 팀장의 분석이다.

참고자료 : 김진호, <농어촌 지역발전을 위한 사회적 경제 조직의 역할과 발전방향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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