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당사자 농민의 삶, 이젠 국가가 책임질 때

  • 입력 2023.05.28 18:00
  • 수정 2023.06.11 21:55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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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지난 23일 경기 파주시 군내면 들녘에서 이형일씨가 못자리한 논에 트랙터를 갖다 대자 아내인 윤명숙씨가 모판을 적재함에 싣고 있다. 지뢰사고로 장애를 입은 이씨가 농사를 짓는 내내 아내 윤씨는 말 그대로 남편의 손발이 돼 수십 년 동안 삶을 일궈 왔다. 한승호 기자
지난 23일 경기 파주시 군내면 들녘에서 이형일씨가 못자리한 논에 트랙터를 갖다 대자 아내인 윤명숙씨가 모판을 적재함에 싣고 있다. 지뢰사고로 장애를 입은 이씨가 농사를 짓는 내내 아내 윤씨는 말 그대로 남편의 손발이 돼 수십 년 동안 삶을 일궈 왔다. 한승호 기자

농사지으며 살고 싶은 장애당사자들이 있다. 그들이 농사를 지으려 한다면, 국가는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의 농사를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 각자 살아갈 방식을 선택하는 건 기본권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 국가가 장애당사자 농민에게 오히려 장벽처럼 존재해 왔던 순간이 어느 농민에게나 있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민통선 안쪽에서 40년 이상 농사짓고 살아온 이형일(64)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농촌 장애인 기본권 문제를 다루는 이번 기획의 실질적 ‘프롤로그’로서 이씨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국가가 개간한 곳’에서 지뢰사고 당했건만… 제대로 된 보상은 요원

1984년 8월, 이형일씨는 민통선 내에서 부친의 농사일을 돕던 중 지뢰사고를 당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오른쪽 다리와 오른손을 잃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접경지역은 한국전쟁 당시 온 사방에 깔렸던 지뢰로 인해 언제 어디서 사고를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식량 ‘증산’을 부르짖던 국가는 접경지역에 농지를 개간했고, 어떻게든 삶을 영위해야 했던 실향민(이씨의 부친도 그중 한 명)들은 목숨을 걸고 그곳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이씨는 “민통선 내에서 농사를 시작할 때 군부에서 각서를 쓰게 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군에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며 “지뢰사고 뒤에도 국방부에선 오랫동안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다. 나 다치기 이전에도 지뢰사고로 인한 사상자가 23명이었다. 날 보상하면 그들도 다 보상해야 하고, 군부 지휘관들은 자기네 진급에 문제 생긴다며 이 문제를 회피했다. 정부 주도로 개간한 곳에서 다쳤건만 보상도 못 받고 살아왔다”고 증언했다.

2014년에야 지뢰피해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을 위한「지뢰피해자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이씨 등 접경지역 지뢰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근거가 마련됐다. 그러나 이씨가 보상금을 받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이씨의 이야기를 보자.

“국방부에서 나온 조사관이 내게 어떻게 다쳤냐고 묻길래 ‘지뢰사고 뒤 파상풍으로 (다리) 살을 세 번 잘랐다’고 했는데, 조사관이 조사 뒤 한다는 말이 ‘(이씨를 다치게 한) M-16 살포식 지뢰는 플라스틱 재질이라 다치더라도 파상풍이 없다’는 거였다. 지뢰사고로 파상풍에 걸렸다는 걸 증명해야 보상이 가능하다더라. 어떻게 증명하냐. 목격했던 어르신들도 다 돌아가시고, 근거가 될 문서도 안 남아 있었는데 증명을 하라 하니 황당했다.”

결과적으로 보상은 이뤄졌으나, 보상액은 사고 당시의 물가 및 임금 기준에 따라 책정됐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이 ‘위로금’을 지급하려 할 시의 기준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이씨 외에도 피해자 대상 ‘위로금’ 산정 기준의 문제점으로 인해 피해자 다수가 제대로 된 보상을 못 받는 문제가 대두됐다.

그가 농사지을 수 있었던 이유

이씨가 아내 윤명숙씨를 만난 것은 지뢰사고 이후였다. 윤씨의 부모는 결혼을 반대했다. 윤씨·이씨 부부는 결혼식을 치르지 못한 채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아내는 결혼할 때 밥해주고 빨래하며 ‘보필’해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산업전선’, 즉 농사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윤씨는 남편의 농사일을 함께했다.

윤씨는 철근을 이씨 왼손 크기에 맞게 잘라 이씨의 오른쪽이 있던 곳에 붙였다. 가느다란 철사 5개에 솜을 붙이고서 빠지지 않게 각각 명주실로 감고 보니 영락없는 손이었다. 거기에 장갑을 이중으로 씌웠다. 이씨는 그 손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내가 곁에서 농약 농도를 조절하고 아내가 약을 논에 주면, 초등학생 딸들은 중간에서 농약통 줄을 끌고 다녔다. 모내기 때 아내가 이앙기에 모판을 넣어주면 내가 운전하며 모를 심었다. 딴 사람들(비장애인) 같으면 혼자 모든 작업 다 할 수 있는 건데…. 아내가 정말 고생 많이 했다.”(이형일씨)

현재 이씨는 민통선 내의 1만평 이상 농지에서 벼·콩 등을 재배한다. 트랙터 등 농기계 운전은 직접 하며, 밭에서 제초작업할 시엔 오른쪽 의수(義手)로는 지팡이를 짚고, 왼손으로 풀약을 준다. 농사지을 때 사실상 왼쪽 다리 하나의 힘으로 버티다 보니, 젊을 때보다 기운도 많이 빠지고 왼쪽 다리의 관절염도 심해졌다. 밭에서 다니다가 넝쿨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잦다.

오른쪽 다리 역할을 하는 의족(義足)의 경우, 물이 들어가면 더 빨리 녹슬고 고장난다. 그러니 당연히 이씨로선 논에 직접 들어가지 못한다. 의족이 망가지거나 수명이 다하면, 한 번 구입하는 데 1,500만원이 든다. 그래서 이씨는 의족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쓰기 위해 스스로 닦고 기름칠하고 수리하며 의족을 썼다. 평균 3년에 한 번씩은 교체해줘야 하는 의족을 평균 10년씩 썼으니, 그가 얼마나 정성들여 의족을 관리했는지 알 수 있다.

이씨는 “경기도엔 의족 등의 장애인 보조기구 관련 수리시설이 없다. 고치려면 서울까지 가야 한다. 도시에서 생활하면 의족이 그나마 덜 고장나지만, 난 농사지으니까 더 빨리 고장난다”며 “평탄한 곳에서 작업하는 것도 아니고 굴곡진 밭을 돌아다녀야 하고, 때로는 농사 과정에서 의족이 물에 젖기도 하니 더 쉬이 고장나는 거다. 비가 오면 의족이 물에 젖으니 그때도 해야 할 농작업을 못한다. 비 맞으면 의족의 스펀지 부분이 무거워져서 걸을 수도 없다”고 증언했다.

부부의 작업만으론 농사 진척이 어려우니 사람을 고용하지만, 날이 갈수록 인력은 부족하고 인건비는 폭등하기에 이들 부부 역시 인력난에 시달린다. 인력 부족한 걸 신경쓰지 않는 밭의 풀은 무심하게도 쑥쑥 자라나 작물 생육에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이곳은 민통선 안쪽이라, 인력을 데리고 들어올 때마다 군부대의 강한 통제 및 감시를 받아야 하니 그 또한 농사 과정의 애로사항으로 작용한다.

농기계 사용과 관련해서도 장애당사자 입장에서 애로사항이 많다. 이씨는 “트랙터를 탈 때도 다른 농민들은 운전대에 펄쩍 뛰어 올라가는 게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나는 어디 한 곳에 왼발을 딛고 어딘가를 왼손으로 붙잡고서 힘겹게 올라가야 한다”며 “농기계 ‘편의성’도 내가 확보해야 했다. 트랙터를 타기 힘드니 내가 사다리를 직접 만들어서 타야 했고, 다른 필요한 기구도 내가 만들어서 썼다. 장애 때문에도 그렇지만 농지가 민통선 안쪽이라 (각종 통제절차로) 이동이 불편하니 먼 곳의 농기계 수리 대리점을 가기도 쉽지 않아, 내가 스스로 다 해야 했다. 웬만한 건 다 고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몇 안 되는 지원 받는 길도 ‘험난’

그렇다면 이씨의 농사를 위한 국가·지자체 차원의 지원책은 무엇이 있을까. 소형농기계 50% 보조사업(경기도 예산 15%, 파주시 예산 35%)이 전부다.

해당 사업은 농업용 관리기, 소형 트랙터, 전동분무기, 전동 전지가위 등의 구입비용을 50% 보조하는 사업으로, 장애인 및 여성농민, 65세 이상 고령농 등을 우선지원대상으로 정했다. ‘소형농기계’라 명시해 놨기에 큰 액수가 아닌 200만~300만원 짜리 농기계의 구입비용을 지원한다.

이씨는 해당 사업을 통해 235만원 짜리 모판 적재기를 100만원 가량 보조받으며 구입했다. 그러나 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이씨가 이동권 측면에서 제약이 많다는 점을 인식하며 그의 아래 증언을 읽어보자.

“100만원 보조받자고 서류 내러 가고, 관련 교육 받으러 가고, 또 다른 서류 받으러 가고…. 직접적으로만 4회를 왔다 갔다 했다. 그뿐인가.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 떼고자 파주시청도 서너 번 다녀오고, 정보가 거저 주어지는 체계도 아니니 직접 이곳저곳 다니며 발품 팔고, 서류 하나 떼는 데도 하루를 통으로 보내고…. 최소한 교육 관해선 온라인 교육을 진행 안 하냐고? 그런 거 없다. 기본직불금 관련 교육이 나로서는 온라인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교육이다.”

상대적으로 장애인 이용 편의성이 나은 축인, 한 대당 1억원 이상 가격의 대형·최신형 농기계(대부분 수입산)는 지원대상이 아니다. 최신 트랙터의 경우, 부 변속 시 스위치를 눌러 변속이 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편의장치’가 달릴수록 현장 농민으로선 엄두도 못 낼 수준으로 농기계값이 폭등한다.

이제, 국가가 가족의 ‘고생’을 덜자

사실상 국가에 의해 장애를 입었음에도 합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민통선에서 농사지어 온 이형일씨. 그가 농민으로 살 수 있게 했던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그의 가족이었다. 이씨와 함께 농민의 삶을 살아온 윤명숙씨는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일단 저 사람의 손발이 돼줘야겠다고 생각해 결혼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농사를 지어야 했다. 물론 그 과정은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저 사람을 선택한 거고, 내가 선택한 운명이었지 않나. 그때부턴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농사지으며 살았다. 후회는 없다.”

이씨가 바라는 ‘장애당사자 농민을 위한 국가 농정’은 무엇일까. 이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처럼 영농의지가 있는 장애인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공간부터 마련하면 좋겠다. ‘노는’ 농지를 확보해서 단지화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장애인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지도농’ 등의 인력을 따로 둬서, 장애인이 자립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도록 정책적 설계를 했으면 한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취재․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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