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해도 괜찮은 농사’로 함께 어울려 서는 장애당사자

장애인기본권 연재기획③ 국내 장애인 참여 농업 실천사례

  • 입력 2023.09.24 18:00
  • 수정 2023.09.24 20:45
  • 기자명 강선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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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강선일 기자]

농촌에서 살아가는 장애당사자 주민의 이동권, 자기 생활방식을 결정할 권리, 사회참여를 위한 농(農)적 방안, 장애인 먹거리기본권 등을 한 번에 아우를 주제를 찾기는 애매하다. 분명한 건 이 문제 모두 장애인 기본권에 직결되는 문제이며, 농업·농촌·먹거리 담론과 연결되는 문제라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는 고민 아래, <한국농정>은 장애인기본권 관련 기획을 진행한다.

장애인의 농사, 나아가 장애인의 노동을 우리 사회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을까? 생산성 향상을 최고 덕목으로 여겨온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은 사실상 ‘생산성’과 ‘경쟁력’이 없는 존재로 치부돼왔다.

그나마 ‘사회적농업’ 실천 확대를 통해 장애인의 자립 및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방안을 모색 중인 농업계라고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 최근 한 토론회에 참가한 사회적농업 실천주체 중 한 명은 ‘스마트팜 기반 발달장애인 참여 사회적농업’ 모델을 소개하며, 장애인의 스마트팜 기반 농산물 생산량이 외국인노동자 작물 생산량의 3분의 2 수준까지 올라간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으리라고 언급한 바 있다.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김도현씨는 최근 저서 <장애학의 도전>에서 ‘공공시민노동’을 제안했다. 공공시민노동이란 ‘노동은 시민의 권리’라는 관점 아래 공공영역에서 보장해야 하는 노동을 뜻한다. 김도현씨가 제안한 공공시민노동 심의 기준은 ‘해당 개인이 지닌 현재의 조건 및 능력’에 비춰볼 때 그 활동이 ‘지역사회 구성원의 물질적·정신적·정서적 삶에 기여하는가’이다.

이 기준대로라면 심각한 정신장애·인지장애를 지닌 사람의 경우 그들의 생존활동 자체를 노동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 구상이 실현된다면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된 중증장애인·발달장애인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는 게 김도현씨의 진단이다.

향후 우리 사회에서 공공시민노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고 할 때, 최근 진행되는 장애인 참여 사회적농업은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일하고 싶을 땐 일하고, 쉬고플 땐 쉬면서

충북 제천시 봉양읍 희망그린마을 농장에서 방대진 희망그린마을 대표(왼쪽)가 장애당사자들과 함께 농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희망그린마을 제공
충북 제천시 봉양읍 희망그린마을 농장에서 방대진 희망그린마을 대표(왼쪽)가 장애당사자들과 함께 농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희망그린마을 제공

충북 제천시 봉양읍의 사회적농업 실천기업 희망그린마을(대표 방대진). 이곳에선 귀농한 발달장애인 가족 5가구 및 탈시설 장애인, 사회복지사 등과 함께 농촌에서의 새 삶을 꾸려가고자 노력 중이다.

새 삶의 기반은 당연히 농사다. 방대진 희망그린마을 대표와 직원, 그리고 발달장애인의 가족들이 오미자·고추 농사를 지어 운영에 필요한 수익을 버는 한편으로, 탈시설 장애인 농촌정착 프로그램 및 장애인 참여 사회적농업 프로그램(주말학교·계절학교)을 진행한다.

발달장애인 참여 텃밭농사 교육은 장애인 자립을 목적으로 이뤄지나, 그렇다고 당장 장애인이 농사로 돈을 벌게 하겠다는 취지는 아니다. 장애당사자가 농사를 지음으로써 마을공동체에서 교육·노동·자립의 꿈을 이루며 살도록 하자는 게 주된 목적이다.

농사는 철저히 분업 형식으로 진행된다. 깨 털기 작업처럼 상대적으로 어려운 일은 방대진 대표 등 농사 경험자들이 맡고, 장애당사자는 장애 정도에 맞춰 그가 할 수 있는 작업을 하게끔 조율한다는 게 방 대표의 설명이다. 말하자면 공동체 내의 농사 경험자와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의 가족이 협업을 통해 농사짓는 셈이다.

희망그린마을의 탈시설 장애인 정착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오랫동안 생활방식 선택권 등 각종 기본권을 침해당한 발달장애인이 사회 복귀 뒤 이후의 삶을 어찌 꾸릴지에 대한 사회적 숙제는 여전히 남은 가운데, 희망그린마을은 탈시설 장애인 주거공간을 만든 뒤 제천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픈 탈시설 장애인들을 초대했다. 이들 또한 농사교육을 받으며 차차 자립의 길로 나아간다.

방 대표는 “더는 시설에서 짜놓은 방식대로가 아닌, 장애당사자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들자는 게 우리의 입장이다. 농사일도 마찬가지다. 일하고 싶을 땐 일하고, 쉬고 싶을 땐 쉬자는 것”이라 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시 거주 장애인의 주된 일자리인 임·가공업이나 공장 생산노동과 비교할 때, 농사는 좀 더 포용력 있는 노동이다. 공장 작업 공정의 실패가 제품 불량 등으로 이어져 큰 손해를 끼칠 시, 장애당사자는 큰 패배감을 느끼게 되고 장애인에 대한 주변의 부정적 태도도 강화된다. 반면 농사는 실수해도 된다. 익지 않은 작물을 딴다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작업 과정에서 장애당사자가 느끼는 만족감·자존감도 크고, 자기 일에 대한 거부반응도 사라진다. 무엇보다 작업을 혼자가 아닌 ‘협업’으로 하기에, 작업 과정의 어려움은 함께하는 직원과 가족이 서포트(지원)할 수 있다.”

김도현씨는 <장애학의 도전>에서 그동안 장애인의 삶의 방향을 ‘자립/의존’이라는 이분법적 방식으로 규정해 왔던 상황을 지적하며 ‘연립(함께 어울려 섬)’의 가치를 강조한 바 있다. 홀로서기도, 낙인화된 의존도 아닌,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함께 서는 연립의 가치. 희망그린마을 또한 그 연립을 실현하고자 노력 중인 곳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함께 서기

‘연립’은 희망그린마을 범위를 넘어서서도 이뤄진다. 희망그린마을은 제천 내 발달장애인 관련 단체들과 협약을 맺어, 함께 발달장애인 참여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제천 관내 발달장애인들은 희망그린마을 보유 농사시설 및 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희망그린마을은 제천 관내를 넘어 세종시 장애아동통합지원센터와도 도농교류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넓은 범위의 ‘연립’은 달리 말해 지역 단위 구성원 돌봄을 위한 ‘연결망(네트워크)’ 형성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선 전북 완주군의 사회적 협동조합인 완주사회적경제네트워크(완사넷)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완사넷의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지만, 완사넷 내 장애인분과엔 지역 내 협동조합들과 완주군 장애인복지관, 완주군청,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장애인분과 등 다양한 민·관 주체들이 참여해 지역 내 장애인 관련 의제설정에 앞장섰다. 완사넷 장애인분과는 2019년 장애인의 여가활동 및 일자리 측면에서 사회적농업과 장애인을 어떻게 연결할지 논의하던 중, 지역 내 실태 파악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며 완주군 내 장애인 일자리 욕구 및 일상생활력 관련 조사를 진행했다.

완사넷 장애인분과는 조사 결과를 기반으로 △거점지역 중심 청장년 장애인 자조모임 운영 △취업교육 욕구에 따른, 지역 특성에 적합한 (장애인) 사회적농업 접근 방안 모색 △취업 중인 장애인의 삶의 질 높이는 활동 내용 개발 △건강한 시간제 일자리 개발 위한 지역 상권 분석 △시설 장애인 대상 일자리 창출 △정부주도형 정책형 장애인 일자리 모형 창출 등의 과제를 제안했다.

완사넷 사례를 탐구했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자들은 “사회적경제 연결망이 사회적농업 실천 행위자에게 도움을 주는 자원의 저수지로서만 일방적으로 기능하는 건 아니다. 그 연결망 안에서 이뤄지는 사회적농업 실천은 되먹임하여 그 스스로 배태된 지역사회 내 협력의 연결망을 두텁게 재구성한다”고 평가했다.

참고자료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촌의 포용성장과 사회혁신을 위한 사회적 경제 전략>(2022)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오월의봄, 2019)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취재․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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